‘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모순…그에겐 전과만 남았다 [고립무원 ‘무적자’](상)처벌에 치우친 국가 범법 행위로 존재 드러나…관리 차원 ‘사회보장번호’ 부여 신분 없어도 형사 처벌…복지 수혜는 불가 인권 사각지대 안재영 기자

2024년 06월 25일(화) 20:39

사진=아이클릭아트

본보가 지난 13일 처음 만난 ‘무적자’ A씨의 삶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법은 A씨를 벌할 때에만 작동했고, 신분이 없다는 이유로 복지 혜택에서는 제외됐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A씨의 발자취는 지어낸 이야기로 보일 수 있지만, 그에겐 어제에 이어 오늘도 마주하는 현실이다. 이에 본보는 A씨의 삶을 조명,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무적자에게 무심했는지 짚어보고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3차례에 걸쳐 보도한다. /편집자 주

무적자(無籍者). 문서가 없는 사람이란 뜻이다. 여기서 문서란 정부기관 서류를 지칭한다.

정리하면 무적자는 정부기관 서류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나, 이는 잘못된 표현으로 보인다.

무적자라 불리지만 입법·사법·행정이란 삼권으로 나뉜 정부기관의 서류에 기록된 이가 있기 때문이다.

무적자 A씨는 도로교통법 위반(음주·무면허 운전),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지난 1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A씨는 성과 이름은 물론 국적과 등록 기준지도 알 수 없어 ‘성명불상’으로 기소됐다.

인적사항 중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은 A씨에 대한 처벌이 가능했던 건 범죄 행위만은 분명한 ‘국내범’이어서다.

사법부 등 정부 기관이 성명불상의 A씨를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18년 10월 영광경찰서는 도로교통법 위반(음주운전) 혐의로 A씨를 붙잡았다.

조사 과정에서 A씨의 신원이 좀처럼 파악되지 않자 영광경찰은 경찰청과 광주출입국·외국인사무소에 확인을 의뢰했으나 내·외국인 누구도 특정되지 않았다.

결국 A씨는 성명불상으로 검찰에 넘겨져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당시 광주지검은 처분 후 대한법률구조공단 광주지부에 A씨의 ‘성과 본 창설허가’ 청구 제기를 의뢰했다.

이에 대한법률구조공단이 2019년 1월 광주가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A씨는 신분을 얻을 길이 열렸으나 최종 무산됐다.

관련 문서에 의하면 대한법률구조공단은 A씨가 영광경찰서에서 조사 받을 때 “어릴 적(6세 정도) 엄마와 함께 중국 심양에 갔다가 헤어진 후 30년 정도를 혼자 중국에서 생활했으며, 10년 전 즈음 불상의 남자와 공항을 통해 한국에 입국한 후 노동일을 전전하다 약 7년 전부터 현 주거지(영광군 염산면 소재)에서 살고 있다”고 진술했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겨 와 청구원인으로 작성했다.

그러나 지난 18일 A씨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며 중국에는 간 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A씨는 또 당시 청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모른다고 밝혀 대한법률구조공단이 A씨를 만나 얘기를 나눠본 적 없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소송을 맡았던 변호사는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답했다.

다만 2019년 7월 청구가 기각되자 대한법률구조공단은 항고까지 나선 것으로 확인됐다.

항고 기각 결정이 내려지기 전 A씨는 또 한 번의 범법 행위로 재판대에 섰다.

재판부가 A씨에게 벌금형을 선고하면서 이름도 없는 그에겐 전과가 남았고, 지난 13일 재판에선 양형 요소로 반영됐다.

두 차례의 형사 처벌을 받는 동안 달라진 건 영광군이 A씨에게 ‘사회보장번호’를 부여했다는 점과 그를 돕는 특정후견인이 생겼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사회보장번호는 관리를 위한 것일 뿐 신분을 증명하는 용도가 아니어서 A씨는 그 어떤 복지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A씨가 기본 교육을 받고 아플 때 치료받는 등 인간이라면 누려야 하는 인권의 영역에서도 소외됐다는 점이다.

영광군 관계자는 “A씨의 존재를 알게 된 뒤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다양하게 모색했으나 법적 근거가 없었다”며 “진행 중인 성과 본 창설 허가가 받아들여져야 복지 제도 수혜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안재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