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마당]가을 언덕에서 / 수필 - 소묘란 |
| 2024년 08월 19일(월) 1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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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도 빛깔도 하늘도. 나뭇잎에 곱게 물든 곳곳의 사연까지. 바람처럼 물길처럼 구름처럼 흘러가는 세월이 못내 아쉬워 집을 나서다 지척에 있는 강가로 발길을 돌렸다. 강은 여전히 그만큼의 수량을 담고 유유자적 흐르고 있다. 우거진 풀숲은 어느새 물기를 거두었고 드넓은 강가에는 은빛 가루 흩날리는 억새가 바람 따라 하늘하늘 군무를 추며 노래를 부른다. 드높은 푸른 하늘은 신선한 빛을 담아 들녘으로 부려 놓고 햇빛 받아 반짝이는 윤슬의 아름다움이, 물비늘과 함께 유영하는 작은 물고기들이 이 가을을 더욱 신선하게 그려 놓고 있다. 그 풍경에 홀린 듯 뭇시선은 아랑곳없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취해 있다. 문득 이 아름다운 계절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 생각을 해 보았다. 어디에서 와서 어느 곳으로 흐르는 것일까. 나는, 그리고 저 물은.
얼마 전이었다. ‘나 자신이 단풍인 줄 모르고 단풍 찾아 밖으로 다닌다.’는 문자를 큰 스님께서 보내주셨다. 글을 받으니 계절 따라 곳곳을 찾아 헤매는 곤한 일상을 일깨워 주시려 어깨 위를 죽비로 내려치는 듯한 일침임을 느꼈다. 그렇구나, 생각해 보니 나 또한 단풍인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우매함을 한 줄 문장으로 정신이 번쩍 들게 한 메시지였다. 내 안에 사계절이 있었고 그 계절이 무수히 지나고 있었음을 나는 왜 미처 깨닫지 못했을까. 무엇이 그렇게 혼돈의 시간을 흐르게만 하였을까. 고운 단풍이 아름다운 계절이 우리 인생에 있었음을 어찌 알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쳤던가. 돌아보니 살아온 날들이 꽃 피고 새 울고 새싹이 자라 고운 물 들이는 오색 단풍처럼 아름다운 계절이었던 것을, 우리 인생이었음을 이제야 겨우 실눈 뜨듯 조금씩 보이는 것 같다. 늘, 춥고 힘들고 고달픈 날들만 기억하고 뒤돌아보며 전전긍긍하며 허투루 보낸 시간이 몹시 안타깝다. 이렇게 무심하게 가을 언덕을 맞을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마음을 다해 보람되게 살아나 볼 것을. 뒤늦게 소홀히 보낸 시간이 그 미련함이 아쉽고 부끄럽기만 하다. 그러고 보니 세월의 언덕을 굽이굽이 넘기며 감사하며 산 날은 몇 날이었을까. 비록 비바람에 부대끼며 눈비 맞고 살았더라도 오늘을 살아 있음은 거룩한 삶인 것을.
가을은 성찰의 계절이다. 길가의 한 포기 풀조차 바람에 휘청이더라도 꿋꿋이 견뎌내고 된서리 눈보라 속에서 겨울을 인내하며 씨앗을 날리고 또 다른 봄을 맞는다. 가고 오는 것은 대자연의 이치이다. 역행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에 아직도 순응하지 못하고 일희일비하진 않았는지 반조하여 본다. 가벼이 여긴 하루하루가 이 시점에 드니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부쩍 적어진 이즈음에 이르니 번뇌 망상으로 고뇌하기보다는 스치듯 지나는 시간도 아쉽고 소중하고 더 깊기만 하다. 이젠 터덕거릴 시간이 없다. 갈고 닦음으로 마음 수양을 해야겠다. 눈에 보이는 거울을 닦기보다 마음속의 먼지를 털어내야 하고 닦아야 할 때임을 비로소 깨달으며 가을이 깊을수록 겨울이 다가올수록 마음의 무게 덜어내고자 한다.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의 휘청이는 아픔도 시간이라는 세월이 버텨낼 힘을 주며 치유하듯 만남도 이별도 희비 또한 묵묵히 맞고 또 보낼 일이다.
어떤 시에서 ‘살아진다. 사라진다.’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어떠한 역경에서도 견디며 살다 보면 살아지고 또 그 힘듦 또한 사라진다는 것일 테다. 절망에서 희망의 싹을 키우는 표현이었다. 큰 고통도 견뎌내면 살아지고 그 고통이 결국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 인생이 살아지고 또 사라지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가을이 주는 메시지이다.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이다. 충실히 살아야 한다는 것 더 늦기 전에 더 후회하기 전에 최선을 다해서 그리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늦가을이, 가을 언덕이 이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 나에게 던진 메시지이다. 마냥 주저앉아 있지 말라는 주문이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능력껏 하라는 응원이고 종용이다.
석양 무렵 바라본 가을이 더없이 아름답다. 오색 창연한 단풍에 된서리 내린다 해도 바스락거리는 낙엽으로 흩어지더라도 이 가을은 눈부시게 곱다. 나 또한 가을이다. 비바람에 떨어질지라도 지금 이 순간은 찬란하기에.
큰 스님의 말씀도 시인의 시구(詩句)도 나에게 새로운 나침반이 된다.
가을 언덕에서 작은 지혜의 눈을 뜬다.
<소묘란 약력>
▲‘시와 의식’ 등단(1991)
▲대한문학상 수상, 광주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고문(현)
▲수필집 : ‘지금도 그곳에는’, ‘흘러가는 것은 강물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