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화양연화 / 김미진

2024년 08월 25일(일) 19:40

마량에서 득량까지 남도 마을 이어지는
그 길에 설탕처럼 햇빛 흠씬 녹아 있네
거푸집 쇳물 스미듯 아스팔트 공극 간

십팔 번 국도 위에 무더기로 쏟아지네
빛 가루 빈틈없이 낮은 산야 바람까지
한 생애 숯불 붙이는 은화로 속 저 말씀
(시조집 ‘빵의 전개도’, 고요아침, 2024)

[시의 눈]

내 생애 화양연화(花樣年華)는 20대 초반 강진 마량항에서 보성 득량만을 거쳐 고흥 나로도까지 발동선으로 갔던 게 절정이지 않나 싶습니다. 마을 돌담 유자에 반사된 햇빛, 그리고 갯벌낙지 잡다가 빠질 때 ‘숯불 붙이는 은화로 속’같이 아가씨들 눈길을 모으게 한 때였군요. 영화 ‘화양연화’에서는 같은 날 그 아파트로 이사온 첸과 차우가 넥타이와 가방이 배우자와 것과 같음을 알고 비밀리 사랑에 빠져들지요. 2020년에 리메이크된 왕가위 감독의 이 영화는 저우쉬안의 곡 ‘화양적 연화’(花樣的 年華)에서 따왔다 합니다. 중일전쟁의 혼란기에 태평성대에 대한 그리움을 소환한 노래입니다. 무릇 사람마다엔 ‘무더기로 쏟아지’던 그 화양연화의 시대가 있지요. 우린 그날 새벽 마량항 도선을 타고 고흥 나로도까지 네 시간을 갔더랬지요. 친구가 봉래면 학교에 근무한 70년대 초였네요. 그땐 무슨 힘이 남아돌았던지 달밤에 막걸리 마시며 기타를 쳤고, 이튿날 아침엔 낚은 고기로 매운탕을 끓여 먹던 기억도 있습니다. 앞산 넘실대는 목백일홍 풍경이 숯불처럼 붉을 때, 한 아가씨가 손수건을 건네며 땀 닦으라던…, 오늘 그걸 노트북에 올리며 내 청춘의 ‘쇳물’이 스미던 ‘화양연화’를 재현해 봅니다. 김미진 시인은 해남에서 나, 2020년 ‘월간문학’ 등단, ‘시조시학젊은시인상’을 수상했고, 현재 ‘디카문학’ 편집장이자 문인화가입니다. 그는 사물마다 다양한 상상력과 시적 지평을 새로이 여는 레지탕스적 시인입니다. <노창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