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카 / 박남기

2024년 10월 10일(목) 19:45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

엄카(엄마 카드)와 달리 딸카나 아카를 들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 부모님을 잘 모셨다고 생각했다. 팔도강산 강연을 다니면서 늘 부모님을 모시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내 강연을 한 번 들어보고 싶다고 하셔서 그리하시게 했다. 부모 대상 강연 말미에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지만, 열심히 뒷바라지해서 자녀를 서울대와 연대를 졸업시킨 부모가 이 자리에 계신다며 일어서시게 했다. 그분들이 바로 내 부모님이라고 했더니 박수갈채가 터졌다. 차에 오른 아버지께서 한 말씀 하셨다. 계단을 내려오는 데 무릎이 아프지 않더라고. 아버지는 장가들기 전부터 관절염으로 잘 걷지 못해 평생을 고생하며 사시던 분이었다.

머나먼 이국땅에 출장 왔다가 잠시 멍하니 길 위에 서 있었다. 부모님 돌아가신 후에 후회나 그리움이 남지 않게 하겠다며 살아왔는데 오늘은 갑자기 내 아이를 통해 내가 놓친 커다란 구멍을 발견했다.

나는 딸만 셋이다. 그중 한 아이가 직업을 갖고 결혼을 하더니 갑자기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와 함께 “이제 딸 덕을 보는 인생의 제2막이 열렸습니다. 그동안 잘 길러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편지글도 주었다. 환전 비용도 들지 않는 특별한 달러 카드이니 해외여행 시에 걱정 없이 쓰라고 했다. 고맙다며 외국에서 식사를 할 때면 종종 사용했다. 이번에도 출장지 도착 직후에 안부를 전하며 오늘 저녁 식사에 네 카드를 사용하겠다고 하니 좋은 것 사드시라고 했다.

딸이 사준 저녁을 맛있게 먹고 식당을 나서는데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 나는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신용카드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던 시절, 돈 대신 카드란 것을 가지고 다니면 된다던데 어떻게 만드는 것이냐고 아버지께서 물으셔서 방법을 가르쳐드렸던 기억이 난다. 그 뿐이었다. 내 아이처럼 나도 부모님께 신용카드를 만들어 드렸더라면, 아까워서 거의 사용하지는 않으셨겠지만 품고 다닐 때, 카드를 사용해 친구들에게 밥 살 기회가 있을 때의 행복감은 아주 컸을 텐데 나는 내 딸아이만큼은 속이 깊지를 못했다. 내 주위에는 아들이 만들어 준 카드인 아카를 자랑하는 사람도 있는데 말이다.

자랑질하는 것은 세상의 질시를 받는 지름길이기에 거의 하지 않는데, 언젠가 회의 마치고 술 한 잔 핑계로 참석자들에게 딸카 자랑을 하고 말았다. 그랬더니 다른 한 사람이 공부를 마치고 최근에 귀국한 아들 이야기를 해주었다. 공항에 마중 나가 그간 참으로 고생 많았다며 안아주었더니 불쑥 “이제 어머니 아버지 돌아가셔도 돼요.”라고 하더란다. 놀라서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자기가 학위를 마쳐 돈을 벌게 되었으니, 자식 뒷바라지 걱정하지 않고 편히 지내셔도 된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했더란다. 외국에서 오래 살아 한국말이 익숙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평생 힘들게 뒷바라지해온 아들 입에서 이제 부모님 죽어도 된다는 말이 나오니 참으로 어이가 없더란다.

동료 교수처럼 셀프디스(자기비하)가 자랑질보다는 백배 나은 유머 소재이다. 그런데 욕먹을 각오로 자랑질을 하는 이유는 아쉬움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부모에게 얹혀사는 젊은이가 늘어나 고령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이 은퇴를 못 하고 있다고 한다. 잘 되어 독립하더라도 부모에게 서운한 것만 이야기하지, 자신이 이룬 결실을 부모와 나누려 하는 자식도 많지 않다. 우리 세대가 부모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틋함을 우리 자녀 세대 중에는 가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왜일까?

우리 부모들 대부분은 자신이 가진 돈과 시간 그리고 에너지를 오롯이 자녀를 위해 희생하셨다. “저 사람(부자)들은 모두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바쳤지만 이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이다.”라며 그를 높이 사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우리 세대의 눈에 부모님은 가난한 과부로 보여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렸다. 우리 자녀들의 눈에 우리는 부자처럼 행동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나 돌아본다. 그러면서도 가난한 과부와 같은 대우를 받고 싶은 것은 헛욕심일 것이다. 먼 이국땅에서 딸카를 사용하다가 덜컥 부모님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으로 밤을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