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 일몰 / 범대순

2024년 10월 13일(일) 19:49

범대순

흙의 하늘은 이미 뒤가 멀다
넓고 긴 푸른 강같이
아름다운 도시의 노랫말같이
할머니의 타고난 눈물같이
그리스의 돌과 돈황 막고굴의 모래같이
허무한 것의 끝자락을 비로소 알 것 같아
숨이 가쁜데
그것을 알고 새가 해같이 서산을 간다
(시집 ‘가난에 대하여’, 문학들, 2011)

[시의 눈]

가을이 제 무게를 견디려고 서산을 향해 갑니다. 난 무등산 쪽의 동창을 엽니다. 어느덧 거기 시인은 하얀 수염을 날리고 있습니다. 13년 전, 내가 사무실을 이전했을 때, 그가 선물로 와인을 준비해 왔더랬습니다. 그 담소와 잔을 받으며 붉게 젖던 무등을 떼 낼 수가 없지요. 창너머 산의 일몰과 함께하던 때였으니까요. ‘넓고 긴 푸른 강’을 돌아 ‘도시의 노랫말’을 읊조리며 무등산 봉우리마다 청청한 힘을 넣어주던 시인이었군요. 그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해진 치마가 강과 도시를 지나 저 무등에 걸려 있다 했습니다. 그가 즐겨 찾던 토끼봉, 세인봉, 중봉 그 독행(獨行)을 따라 나도 오르고 왔지요. 그래, 이제 막 필이 차오르려 합니다. ‘그리스의 돌’을 모래로 묻어버리듯, 이젠 내 안의 낡은 시간들을 내보내야 겠습니다. 어느덧 노을이 새의 길을 터줍니다. 그러자 어둠에 묻힌 산이 고즈너기 그 깃을 펄쳐 올립니다. 범대순 시인(1930-2014)은 광주 출생으로 고려대 영문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했고, 목포교육대학과 전남대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시집으로 ‘흑인고수 루이의 북’(1965), ‘이방에서 노자를 읽다’(1986), ‘아름다운 가난’(1996), ‘무등산’(2013), ‘백년’(2015, 유고시집) 등이 있습니다. 그는 야성의 노장사상에 터한 시학을 전개했다. 특히 만년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무등산을 오르고 호흡하며 노래한 무등 정신주의 시인이었습니다. <노창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