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유경만리(柳京萬里) / 곽재구

2024년 10월 27일(일) 19:25

내게 피할 수 없는
이틀의 시간 주어진다면
하루는 유경 강마을의
소금쟁이 되리

긴 발로 소곰소곰 물 위를 스치다
흘러오는 꽃 한송이 만나면
칠십년 서러운 가슴팍 꼭 안아주리

남은 하루
소금쟁이 발 아래
반짝이는 윤슬 되리

고 조고맣고 귀여운
소금쟁이 발바닥에
소곰소곰 쓰인 시 한줄
밤새 흐르는 달빛에 읽어주리

(시집 ‘꽃으로 엮은 방패’, 창비, 2023)

[시의 눈]

소금쟁이가 뜁니다. 한방울 물도 묻히지 않는 자유롭고도 가벼운 발짓이군요. 그는 못 위를 소곰소곰 행간이듯 촉지해 갑니다. 시를 읽는 그 발 아래 윤슬 되어 만리의 유경 강에 이르고 싶습니다. ‘칠십년 서러운 가슴팍’을 안고 그에 놓인 시를 읽는 달빛의 강이 푸릅니다. 저무는 생에 늦게나마 소금쟁이 발에 놓일 시 한 줄을 다듬습니다. 옛 하교길, 난 그를 잡으려다 그만 미끌려서 젖어버린 책을 안고 한없이 울었더랬습니다. 진흙 책, 그의 자취 따라 읽어가다가 아, 가지 못할 강을 꿈꾸던 흑백기억이 오늘 되살아납니다. 곽재구 시인은 전남대 졸업,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사평역에서’(1983), ‘전장포 아리랑’(1994) 등을 펴냈습니다. 그는 사물 내면에 깊은 서정으로 파고들어 삶의 따뜻한 은사를 잣는 시인입니다. <노창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