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이 가져온 불화(不和) / 천세진 |
| 2024년 11월 03일(일) 1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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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태어난 존재가 문화인 경우는 어미-자식 간의 관계보다 불화가 더 크다. 시간적·공간적으로든 이질(異質)이 전제돼 있고, 혈통적 친연성이 없는 만남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종(異種)의 문화도 공존할 수 있다. 덕분에 융합과 통섭의 문화가 태어난다. 다만 깊은 이해와 포용이 전제돼 있어야 한다.
문화보다 물질적인 성격이 강한 문명의 경우는 거의 언제나 불화하고 공존도 어렵다. 새로운 문명적 존재의 탄생은 이전의 것을 밀어내야만 성장한다. 총과 자동차가 발명됐는데 화살과 마차를 고집하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 문화는 믿고 따르는 가치의 문제라는 성격이 강하지만, 문명은 생명 존속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물질적 효율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성격 때문에, 신기술과 구기술이 일으키는 불화의 결말은 거의 언제나 ‘대체’의 형태로 나타난다. 현시점에서 가장 첨예한 기술 대립의 사례는 내연기관 자동차와 전기자동차다. 기후 위기 해소 등의 명분으로 인해 내연기관 자동차는 전기자동차로 대체될 것이다.
새로운 기술은 이전의 것과 맥락 없이 탄생하지 않는다. 이전의 것들을 개선하는 것에 신기술의 가치가 있다고 인식되기 때문에 신기술은 이전의 것을 대체한다. 그런데 이전의 기술들이 가진 나쁜 것들을 좋은 것으로만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전기자동차가 친환경이라고 하지만, 기후 위기를 벗어나게 할 방법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는 이유다.
리튬을 얻기 위해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을 비롯해 전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채굴이 이뤄지고 있다. 세계 곳곳에 있는 원유 시추공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리튬 광산이 더해진 것이 현실이다. 전기자동차라는 신기술 결과물이 인류를 구원하겠다면 배터리를 만드는 과정과 전기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친환경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새로운 환경오염의 탄생이다.
AI가 가져올 대체는 전기자동차가 가져올 대체와는 질이 다를 것이다. AI도 전기자동차처럼 도구임이 분명하지만, 인간과 인간의 본질적 역할까지를 대체하게 될 것이다. 신기술이 이전의 한계를 넘어선 혁신이라지만, 이전의 것을 파괴하는 속성도 지니고 있다. 대체되고 파괴될 대상이 인간이라면 기술혁신이 ‘기술을 위한 기술’은 아닌지, 그 진정한 의미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기술을 통해 혁신해야 할 사회라면 기술적 가치 이상의 것을 지니지 못한 깊이 없는 사회다. 한국이 그런 사회로 바뀌고 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기계화 정도가 가장 높고, 신기술이 가장 빨리 접목되는 나라다. 한국인들은 아직도 자료 전송에 팩스를 사용하며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에 뒤처진 일본을 보며 우월감을 느낀다.
코로나19 시절 스마트폰을 통한 디지털 방식의 존재 증명을 끊임없이 요구받았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불편하게 된 사회가 과연 유토피아일까. 한국은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시스템을 구축해가고 있다. 그게 자랑스러운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신기술은 문명적 사물의 운명을 가르기만 하지 않는다. 스마트폰 같은 문명적 사물이 인간과 오래 함께 지내면 문화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태어난 문화가 이전의 것들을 몰아내는 방식을 취하면 그 영향에 든 공동체는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것에 더해 파생적 변화까지를 만들어낼 수 있겠지만 뿌리가 약한 공동체가 되고 말 것이다.
모든 기술은 혁신적이고 동시에 파괴적이다. 이득을 주는 동시에 해를 끼친다. 이득만을 바라보고 파괴에는 눈감으면 불화는 깊어진다. 이득조차 언제나 자의적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득이, 누군가에게는 손해가 될 수도 있다. 모두에게 이득이 돼야 하지만 그런 기술은 없다.
신기술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지만 착각이다. 기술이 첨단화되고 정교해질수록 일상이 편안해질 수 있지만 통제해야 할 부작용도 그만큼 많아진다. 그 부작용을 통제하지 못하면 행복은커녕 새로운 불행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