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장미원에서 / 시 - 허갑순

2024년 11월 25일(월) 19:22

장미꽃이 고개를 든다
깊숙이 숙인 이마 위에
서늘한 안개가 앉아있다
뿌옇게 탈색된 안개의 혀끝에
달랑 장미꽃 한 송이 거칠게
꽂혀있다
장미꽃들의 행방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아직 여름이 한창인데
정원사에게만은
장미들은 한 송이의 꽃일 뿐
얼굴이 아니다
계절을 타지 않는 정원사는
아직 시들지 않은 여름을
무자비하게 잘라버린다
찰칵찰칵 시간이 잘려나가고
가을이 그의 손끝에서 장미꽃을
피워 올린다
가위질에 능숙한 정원사는 신이 났다
세상을 바꾸어야지
장미꽃을 바꾸어야지
장미 한 송이 사람들을 닮았다
겨울이 슬그머니 손을 뻗어 정원사의
얼굴을 찌른다 굵은 가시 아직
싱싱하다

<허갑순 약력>
▲‘시와 산문’으로 등단(1995)
▲서울 시인상, 국제펜광주문학상, 광주시문학상 수상
▲시집 : ‘새벽이 환하게 오고 있다’ 등 8권
▲저서 : ‘현대시의 시간과 공간인식’ 등 2권
▲전 조선대, 동신대 외래교수, 현 광주YWCA신협 상임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