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제타스톤과 베히스툰 / 천세진 |
| 2024년 12월 01일(일) 18: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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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지구상에 7천개 정도의 언어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문자는 23개 정도다. 언어는 수만 개 넘게 존재했을 것이 분명하고, 문자도 23개보다 최소한 몇 개는 더 존재했을 수 있다. 흔적과 고리가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가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인류 역사상 언어와 문자의 고리가 단절된 예는 숱하게 존재한다. 많은 문명이 다음 시대와의 연결고리를 상실하고 허무하게 망각의 세계 속으로 스러졌다. 다행히 연결고리를 찾아내 감춰졌던 역사가 드러난 사례도 있다.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오랫동안 안개 속에 있었다. 1822년 프랑스 언어학자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1790-1832)이 고대 이집트 문자인 ‘신성문자’를 해독하기 전까지 이집트의 역사와 문화는 기이한 형상들의 나열로만 보였다. 그 이전까지 이집트에 대한 이해는 고대 그리스 문헌에 남겨진 내용들에만 의존했다.
샹폴리옹의 신성문자 해독은 서로 다른 문명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집트의 문화를 기록한 신성문자는 1798년 이집트 원정을 떠났던 프랑스군이 1799년 로제타 항의 서쪽 나일강 강변에서 발견하여 나폴레옹(1769-1821)의 지시로 프랑스로 가져오려다가 영국군에게 빼앗긴 로제타석(Rosetta Stone)에 담겨 있었다.
로제타석에는 기원전 305-기원전 30년 사이에 이집트를 지배한 마케도니아 혈통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공표한 법령이 기록돼 있었는데, 같은 내용이 기원전 9-7세기에 사용된 이집트 상형문자(신성문자), 이집트 일반대중이 사용했던 문자, 그리스어 등 세 개의 문자로 적혀 있었다. 통치 왕조의 민족과 피지배민족이 서로 달랐던 것이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서로 다른 문자를 사용하는 다민족 국가였기 때문에 공문서를 만들 때 세 가지 문자로 기록해야 했고, 그 번거로움이 인류에게는 오히려 문화적 축복으로 작용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사용한 쐐기문자도 신성문자가 해독된 궤적과 같은 길을 걸었다. 쐐기문자(설형문자)의 해독은 페르시아의 전성기를 연 다리우스 1세(기원전 550년 경-기원전 486년 경)의 업적을 기록한 베히스툰(Behistun, 이란 서부 케르만샤주에 있는 유적. 높이 153m의 암벽에 3개의 쐐기문자로 내용이 새겨져 있다) 비문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다민족 국가였던 페르시아는 비문을 페르시아·엘람·바빌로니아(아카드어의 후기 형태)의 세 가지 문자로 기록했다.
고대 페르시아어가 1802년 해독돼 있었던 덕분에 영국 동인도회사의 군인 겸 주재원 헨리 롤린슨(1810-1895)이 비문 내용의 ‘다리우스’를 단서로 1835년 쐐기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만약 고구려의 영향권 안에 있었던 말갈, 여진족이 독자적인 문자를 갖고 있었고, 광개토대왕릉비가 통치 권역 안에 들어있던 말갈, 여진족 등의 문자로 함께 작성되었다면 조작설 같은 것은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언어와 문자가 앞으로 맞을 운명은 소멸이다. 영어만 살아남지는 않겠지만, 소수만 살아남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어느 학자는 인류의 언어가 영어로 통일되면 소통이 더 잘 이루어질 것이라는 극단적이고 반문화적인 주장을 한다. 과연 그럴까. 한국인들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불통이다.
걱정스럽게도 하나의 언어로 축소되는 현상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 전 세계를 잇는 SNS는 소통을 위해 점점 영어로 단일화되고 있다. 그와 더불어 거의 모든 언어의 질적 추락이 나타나고 있다. 보편적 소통을 위해서는 언어가 낮은 수준으로 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역어와 사용 빈도가 적은 말이 계속해서 사라지면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문화적 생태가 파괴되고 폐허만 남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들의 역할이 엄중하다. 작가는 여러 시대와 여러 세대의 언어를 한 몸에 품은 살아있는 로제타스톤과 베히스툰의 역할을 해주어야 하고, 사회는 그런 고난을 떠맡은 작가들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