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은 깊은 눈을 만든다 / 박노식 박노식 시인·시앤영 원장

2025년 10월 13일(월) 19:16

가을 하늘은 아침 세안(洗顔)을 방금 마치고 거울 앞에 선 젊은 여인의 얼굴처럼 티 없이 맑다. 근심이 없어 보인다. 간혹 지나가는 흰 구름만이 잘게 부서진 형체로 청명한 하늘을 떠돌 뿐, 상심 없는 표정은 아이의 심성을 닮은 것 같다.

여름날의 그 웅장하고 변화무쌍했던 구름들이 어느 순간 사라지는 걸 보면, 아무리 지독한 갈등과 번민도 때가 되면 해소되리라는 작은 위안을 구름을 통해 받는다. 이처럼 가을 하늘은 사색과 영감을 동시에 안겨주는 푸른 창과 같아서 쉬이 눈길을 떼지 못할 때가 있다.

대지는 그야말로 형형색색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빛과 색으로 가득 차서 숨이 가빠온다. 산은 푸르면서 간간이 누르스름한 얼굴로 조금씩 야위어 가고, 들녘은 온통 누렇게 물들어버렸다. 길가의 벚나무 가로수는 연약한 마음의 여인처럼 가을의 심장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이미 잎을 떨어뜨린 채 울상을 짓고 있다.

한로(寒露)는 지났고 다음 주에는 상강(霜降)이 자리 잡고 있어서 뜰의 국화는 서서히 꽃망울 맺을 준비를 한다. 조숙한 국화 몇몇은 벌써 꽃망울 속에서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듯 요조한 모습으로 눈을 감았다.

추석이 낀 긴 연휴 동안 사람들은 고추잠자리처럼 몹시 분주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이곳 한적한 시골 마을도 사람 소리로 가득해서 모처럼 북적북적했다. 아이들은 시골길을 신기한 듯 돌아다니며 가을 햇빛 속의 노랑나비처럼 마음껏 뛰놀고, 젊은 부부는 손을 잡고 농로를 해찰하듯 돌아다녔다.

산속 여기저기에서는 성묘를 마친 사람들이 한가로이 둘러앉아 얘기를 나누며 음복하는 모습이 꼭 상심에 찬 얼굴이 아닌 듯하다. 이 묘소의 주인은 오래전에 터를 잡고 누웠으므로 묵은 묘와 같아서 무성했던 잡초를 며칠 전에 말끔하게 벌초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찾아온 참배객들의 얼굴은 슬프지 않고 그저 덤덤해 보인다.

하지만, 잔디 뗏장을 입힌 지 불과 한 달도 안 된 묘는 듬성듬성 흙이 보여서 망자의 숨결이 곧장 느껴지기도 한다. 이곳을 찾아온 참배객들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한 채 곡을 하면서 등을 돌려 눈가를 훔치게 마련이다. 가을 하늘이 유난히 슬프게 보이는 건 너무 냉정하리만치 투명해서 이들의 가슴을 때리기 때문이다.

이용악(1914-1971) 시인의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가 떠오르는 한낮에 필자는 농로를 산책길 삼아 나서지만 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우리 집도 아니고/ 일갓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最後) 최후의 밤은/ 풀버렛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領)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마디 남겨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만(灣)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깔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를 가리켰다/ 때늦은 의원(醫員)이 아모 말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 최후의 밤은/ 풀버렛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짧았지만 흥성했던 긴 연휴가 끝나고 마을은 다시 평온의 세계로 돌아왔다. 항아리 안에 고인 우물처럼 마을은 고요하고 적막하다. 밤이면 또 창가는 풀벌레 소리로 가득 차서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잠을 설치게 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가을밤은 상심을 키우기에 넉넉하고 깊은 눈을 갖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