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수에 오른 광주목사 권율 [노성태 원장의 남도인물열전](42)권율 노성태

2025년 11월 26일(수) 18:37

권율 영정(충남 금산군 소재 충장사)

- 광주목사에 부임하다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가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였던 권율이 거둔 행주대첩이다. 이 행주대첩으로 인해 권율은 임진왜란 당시 육군과 수군을 총괄하는 도원수에 오른다.

도원수로 널리 알려진 권율(權慄, 1537-1599)은 1537년(중종 32)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연리에서 영의정을 지낸 권철과 창녕조씨 사이에 태어난다. 자는 언신, 호는 만취당, 시호는 충장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부친은 영의정을 지냈고, 조부 권적은 강화부사를 지냈으며, 조선 개국공신인 권근은 6대조이니, 당대 뼈대 있는 집안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도승지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위하여 오성부원군에 봉해진 이항복은 그의 사위다.

권율을 모신 사당 충장사(충남 금산군)

가문도 좋고 나름 똑똑했지만 40살이 되도록 관직을 얻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인들과 어울려 전국을 여행하거나 지리를 연구하는 등 한량처럼 지낸다.

친구들이 권율에게 “과거를 보든지 집안 이름을 써서 관직이라도 얻든지 해야지, 자네는 언제까지 그렇게 살 텐가?”라고 묻자, 권율은 “옛날 태공망(강태공)은 나이 80에 현달해도 오히려 천하를 경영하여 백성을 구제했는데, 아직 내 나이가 태공망의 반밖에 안 되고 능력까지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출세가 늦을 걸 걱정하겠는가?”라며 반박했다고 한다.

권율이 과거에 급제한 것은 46살 되던 1582년(선조 15)으로, 임진왜란 발발 10년 전이었다. 그가 과거에 응시할 결심을 굳힌 것은, 사위 이항복이 2년 앞서 급제한 것에 자극을 받아서였다고 한다.

그는 급제 후 정9품 승정원 정자에 임명된 후 5년 만에 종5품 전라도 도사를 시작으로 예조 정랑, 호조 정랑, 경성 판관 등을 거친다. 그리고, 1591년(선조 24)에는 유성룡 등의 추천으로 정3품 의주 목사에 임명된다. 정읍 현감이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임명한 것과 같은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이처럼 권율의 승진이 빨랐던 것은 부친이 영의정을 지낸 이력과 형들이 현직에 있었던 가문의 덕분이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권율은 광주 목사에 임명된다. 권율이 광주와 인연을 맺은 연유다.

-이치전투에서 승리하다
일본은 한양을 점령하고 한반도 전체를 장악해 나갔지만,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의 반격으로 보급로에 차질이 생긴다. 장기전에 빨간불이 들어온 것이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점령하여 병참기지를 만들 계획을 세우고,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전주성 점령을 명령한다.

고바야카와는 영동을 통해 무주를 거쳐 1592년 6월23일 금산성을 함락시킨 후, 전주성 함락을 위해 두 개의 부대를 편성한다. 제1대는 승려 부장 안코쿠지 에케이가, 제2대는 고바야카와 자신이 직접 지휘했는데, 병력의 규모는 기록에 따라 2천여 명에서 만 명까지 큰 차이를 보인다.

당시 금산에서 전주로 가려면 ‘웅치’(熊峙)와 ‘이치’(梨峙)라는 두 고갯길을 넘어야 했다. 일본군 제1대는 웅치를, 일본군 제2대는 고바야카와가 직접 지휘하면서 이치를 공략했다.

당시 웅치는 김제 군수 정담, 의병장 황박, 나주 판관 이복남이, 이치는 광주 목사 권율과 동복 현감 황진이 지키고 있었다. 1592년 7월8일, 김제 군수 정담이 전사하는 등 웅치가 왜군에게 무너졌지만, 권율과 황진이 지킨 이치에서는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며 승리한다.

웅치를 돌파한 왜군이 전주성 앞까지 진출하는 등 전주성이 함락되기 직전, 돌연 일본군이 철수했고, 이치에서 권율·황진 부대와 싸우던 제2진도 큰 타격을 입고 후퇴했다.

전주성을 함락시키려던 왜군이 ‘전주성 함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철수했던 것은, 광주 목사 권율과 동복 현감 황진이 전라도 관군과 모집한 전라도 의병이 용감하게 싸운 결과였지만, 광주 출신 고경명이 이끈 6천여 의병이 금산성으로 진격하면서 금산성이 고경명군에 함락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금산성에서는 7월10일 고경명군이, 8월18일에는 의병장 조헌과 영규가 이끈 승군이 또 금산성을 공격했지만, 대패를 당한다. 고경명과 조헌 등 그를 따르던 의병들도 대부분 함께 전사한다. 일본군 제6군도 힘겹게 금산성을 지키다, 전주성 함락을 포기한 채 9월 경상도 상주로 퇴각한다.

이치전투가 얼마나 어려운 전투였는지는 권율의 사위 이항복이 남긴 ‘백사집’에 “능히 죽을 힘을 다하여 혈전(血戰)을 벌여서 천 명도 채 안 되는 단약한 군졸로 열 배나 많은 사나운 적군을 막아내어 끝까지 호남을 보존시켜 국가의 근본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어려웠던 이유이다”라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천여 명으로 죽을힘을 다해 열 배가 넘는 일본군을 물리쳐 호남을 보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자인한 3대 패배 전투는, 권율의 행주대첩과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그리고 권율과 황진이 막아낸 이치전투다. 이치전투는 호남의 수부(首府)인 전주 즉 전라도를 지켜낸 전투였고, 향후 일본군의 전략에 큰 차질을 가져다준 전투였다.

권율은 정유재란이 끝난 직후 죽기 전 사위인 오성 이항복에게 이치전투가 행주대첩보다 더 중요했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대목이 ‘백사집’에는 “세상에서는 내(권율)가 행주에서 한 일을 공으로 삼는데, 이(이치전투, 필자주)는 참으로 공이라 이를 만하다. 나는 항오(行伍, 군대를 편성한 행렬) 사이로부터 일어나서 공을 쌓은 것이 여기에 이르는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을 적잖이 치렀다. 그중에 전라도 웅치(熊峙)에서의 전공이 가장 컸고 행주의 전공은 그 다음”이라고 나온다.

세상 사람들은 권율의 공으로 행주대첩을 제일로 치는데, 자신은 “이치전투의 전공이 가장 컸고, 다음이 행주대첩”이라는 것이다. ‘백사집’에 나오는 ‘웅치’는 ‘이치’를 가리킨다. 이 전투 이후 권율은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로 승진한다.

권율 이치대첩비

이치대첩 유허비

-행주산성에서 대승을 거두다
1593년(선조 26) 2월12일은 임진왜란사에 매우 중요한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을 거둔 날이다.

행주대첩의 주인공은 전라도 관찰사 권율이 이끈 전라도 관군과 의병, 해남에서 승려 처영이 이끈 호남 승군 등 4천여 병력이었다.

일본군은 이치전투와 독산성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한성에 있는 병력을 총동원했다. 3만의 병력이었다.

권율은 전투를 앞두고 병사들에게 “적세를 살펴본다면 그 양과 질에서 우리가 맨손으로 당해낼 도리가 없으니, 무엇으로써 제압해 이길 것인가. 오직 한가지 죽음으로써 나라의 두터운 은혜에 보답하는 길밖에 없다. 남아(南兒)는 의(義)와 기(氣)만을 생각할 뿐이지, 어찌 공훈과 명예를 다시 논하랴! 천 사람이 한마음으로 서로 죽기를 맹세하자”라고 훈시한다.

이번 전투가 자신의 생사 뿐만 아닌 조선의 운명이 달려있음을 의지로 다짐케 했다.

2월12일 새벽 6시경, 일본군 기병 100여 명이 나타나고 뒤이어 3만 대군이 성을 에워싼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까지 무려 7차례의 대대적인 공격을 퍼붓는다.

조선군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장성 출신 변이중이 보내온 신무기 화차와,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보내온 지자포, 비격진천뢰 등의 위력적인 무기 때문이었다.

7차 공격의 일본군 장수는 이치에서 권율에게 패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였다. 일본군의 일부가 내성까지 진출해 처절한 근접전이 전개됐고, 조선군은 화살마저 떨어져 위기일발의 순간을 맞이한다. 이때 고흥 출신인 충청 수사 정걸이 배에 가득 화살을 싣고 나타난다.

행주대첩을 선조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그날(1593년 2월12일) 묘시(卯時)로부터 신시(申時)에 이르도록 싸우느라 화살이 거의 떨어져 가는데 마침 충청 수사 정걸이 화살을 운반해 와 위급을 구해주었습니다”라는 보고 내용이 ‘선조실록’에 나온다. 충청 수사 정걸의 도움으로 조선군의 사기가 충천했고,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행주산성 전투는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12시간 동안 일본군이 7차례나 공격을 가한 엄청난 전투였다. 병력 수 1대 10의 절대적 열세에도 권율과 처영 등 전라도 관군과 의병, 승병들이 필사적으로 싸웠다. 나주 출신 창의사 김천일은 300여 의병을 거느리고 행주산성 후방을 지원했다.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발발 후 전세를 역전시킨 전환점이 된다. 전의를 상실했던 명군은 다시 힘을 얻게 됐고, 일본군은 더 이상 한양에서 버티지 못하고 철수한다.

명나라에서도 행주대첩의 승리를 치하하며 권율에게 홍비단 4필과 은 50냥을 보내 포상한다. 이후 권율은 도원수가 돼 임진왜란을 총괄 지휘한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선무공신 1등에 봉해졌으며, ‘충장’(忠壯)이란 시호가 내려진다.

-광주공원에 ‘창의비’가 서다
광주공원에 권율을 기리는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都元帥忠壯權公倡義碑)가 서 있다.

도원수 권율을 기리는 창의비가 광주에 건립될 수 있었던 것은 광주와 맺은 특별한 인연 때문이었다. 이미 살핀 것처럼 권율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 광주 목사로 부임한다. 그리고 광주의 관군과 의병을 모아 북상했고, 이치전투에서 승리해 전주를 지켜낸다.

도원수 권율 창의비(광주공원)

이때 승리를 적은 장계를 의주 행재소에 전한 분이, 오늘 금남로의 주인공이 된 금남군 정충신이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권율 창의비는 권율의 11세손인 권재윤이 1901년 광주 군수로 부임한 후 이듬해인 1902년에 세운다. 송병순이 비문을 짓고 권재윤이 글씨를 썼다.

창의비 앞면에는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都元帥忠壯權公倡義碑)를 새겼고, 뒷면에는 남도의 의병장 이름과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 목사에 제수되어 전라도 의병 천여 명을 모았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권율이 광주 목사 시절 이치전투에서 승리하고, 전라도 관찰사 시절 행주대첩에서 대첩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전라도 관군과 의병 덕분이었다. 그가 도원수가 됐던 이유였고, 오늘 광주에 창의비가 서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