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8일(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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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 전 인도유학생 ‘겸익(謙益)’의 흔적을 찾아서 …”
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구법의 길 찾아 떠난 ‘겸익’ <중>

  • 입력날짜 : 2014. 05.22. 20:22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전남대 지리교육과 겸임교수 ① 황금새 전설이 있는 ‘대조사’ ② 겸익과 관련 있을것으로 추정되는 ‘석탑’ ③ 세련되지 않은 초기의 ‘석불’ ④ 대조사 뒷산에 있는 ‘고분’
지난 5월 초순 모처럼의 긴 휴일을 맞아 ‘겸익대사’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그가 인도에 갔다 왔다는 것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역사적 인물이든 신화 속 인물이든, 여행하는 자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다. 둘 다 나름대로 문화향유의 흥미를 주기 때문이다. 아니 때로는 규격화된 역사적 사실 보다는 신화 속 이야기가 더 재미를 준다. 그래서 나는 혜초보다 200년이나 더 일찍 인도에 간 백제 ‘겸익’을 만나는 것에 마음이 들떴다.

겸익이 세웠다고 전해오는 대조사는 충남 부여군 임천면 가림산(성흥산성)에 있다. 높지 않은 가림산(성흥산)에는 신록(新綠)이 새 생명을 움 틔우고 있었다.

비탈진 등산로는 어김없이 푸르러가는 자연의 시간을 따르고 있었다. 산의 남쪽 양지바른 중턱에 대조사가 놓여 있다.

겸익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천년고찰이다(사적기에는 527년 담혜가 세운 것으로 되어 있고, 부여읍지에는 겸익이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옛것이 그리운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는 절이다.

절은 아늑한 계곡에 자리하고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다. 주인(겸익)이 없어서인지 유난히 한적하다.

마당에 들어서니 의외로 쓸쓸하다. 겸익이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낸 곳이다. 이곳에 그의 인생이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이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탐색했으리라. 중생의 깨달음을 위해 고민하는 이들과 소통하고 싶은 소박한 바람이 있었을 것이다. 오직 새소리 바람소리밖에 들리지 않아 겸익이 경전을 번역하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이다.

그리고 이 위대한 세기의 영웅 뒤에는 베일에 가려진 인물도 있었다. 함께 온 인도스님. 그 역시 엄연한 역사 속 실존인물이다. 그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반도에서 원했던 삶을 살았을까. 드라마틱한 혼란기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운명의 삶을 살다 가지는 않았을까. 그의 경이롭고 가슴 뛰는 삶이 가슴을 적신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 물음’에 답이라도 하듯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본다. 그들은 왜 고난의 길을 택했을까? 파란만장한 여정을…. 역사는 흘러도 이들의 운명적 삶은 우리를 사로잡는다.

이들이 살다간 뒤, 오래도록 역사가 이어지는 동안 수많은 중생들이 이곳을 찾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삶이 고단하거나 힘들 때 이곳에 들러 마음을 정화하고 안정을 찾았을 것이다.





절에는 겸익의 여러 징표들이 보인다. 석탑, 석상, 고분, 그리고 그가 다녔던 산길과 숲 등이 그것이다.

원통보전 앞마당에 석탑이 서 있다.

높이 약 520㎝인 3층 석탑이다. 원래 지붕틀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75년 부근에서 몸체 틀을 발견하여 복원하였다.

형태로 보아 통일신라의 탑 형식을 띄고 있다. 탑의 2층 기단 위로 3층 탑신을 올려놓은 형태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드는 비율이 비교적 낮아 안정감을 주고 있다. 지붕돌의 처마는 가운데에서 수평을 이루고, 네 귀퉁이에 이르러 가볍게 위로 들려있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 앙화, 보륜 등이 표현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고 특히 노반이 좁은 편이다.

옥개석은 화강편마암이고 나머지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웅전 뒤의 석불과 같이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이라 전해지고 있지만 그것은 알 수 없다.

당시 중국과 고구려, 그리고 백제는 목탑을 만들던 시점이다. 그런데 겸익이 불교의 본고장이라는 인도에 가 봤더니, 무덤은 있지만 목탑은 존재하지 않았다.

온통 돌로 만들어진 사원과 스투파, 목탑과 목조 사원이 낯설 정도로 인도 사원들의 풍경은 겸익을 깜짝 놀라게 만들지 않았을까?

백제로 돌아온 겸익은 돌로 만들어진 탑을 만들었거나 제시했을 것 아닌가?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 이 석탑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 때부터 백제에 석탑이 나타나기 시작해 대세를 이뤄나갔다는 설이 설득력 있게 들려온다.





대웅전 뒤에는 커다란 석상이 서 있다.

정식명칭은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보물(217호)이다. 직4각형의 석주 형태를 하고 있어 원래 돌의 윤곽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배에 대어 금속으로 된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데 몸에 비해 작고 평면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법의는 통견에 가깝고 오른쪽 어깨부분을 둥글게 덮고 있는 옷자락선이 보이며 앞가슴이 벌어져서 속에 있는 띠 매듭이 보인다.

옷 주름 선은 양팔에 걸친 긴 소매 자락에만 보이는데 도식적인 평행선으로 처리되어 있다. 보살상 뒷면의 옷 주름은 생략되어 있다. 백호와 눈동자를 금속으로 만들어 넣었다. 얼굴은 4각형으로 넓고, 관 밑으로 머리카락이 짧게 내려져 있어 정적(靜的)이다.

신체의 비례가 맞지 않고, 세부 묘사가 단조롭고, 가공기법이 세련되지 않은 조각품이다. 양쪽 귀와 눈은 크나 코와 입이 작아서 다소 기이한 느낌마저 준다.

우리가 흔히 ‘미술’에서 기대하는 ‘미(美)’가 아니고, 감동이나 전율도 아니며, 창의성이나 개성의 표현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영원한 존재 자체가 목적일 뿐이다.

이것 역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이라 하지만, 석탑과 마찬가지로 겸익이 들어 온 시기의 초기 불상이란 생각이 든다.

당시 인도에서는 많은 석불을 만들었는데. 우리나라엔 석불이란 존재 자체가 없었던 시기였다. 곁에 있는 노송이 품위를 더한다. 다가가 보니 천년 세월을 버티며 굽어보고 있는 보호수다.





절 담장 바깥으로 나서니, 성흥산성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솔숲이 반긴다.

낙락장송들이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준다. 하늘은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200m쯤 오르니 고분이 보인다. 아마 겸익이 잠들어 있는 곳이 이곳이지 않을까! 나는 몸을 구부려 경배했다.

겸익은 그가 이제 늙어 눈이 어두워지고 기력이 쇠하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양지바른 곳에 나뭇잎 깔고 덮고 사바세계의 마지막 잠을 청하였고, 열반에 들었다.” 너무나 친 자연적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가진 것 없이 자연으로 돌아갔다. 제자들이 그이 시신을 거두어 그 자리에 고분을 만들었다.

당시 인도 고승들이 죽을 때 택한 방법이기도 하였다. 지금도 히말라야 산속 스님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 천지 만물이 하나라고 여긴 생각에서였다.




■ 대조사의 ‘황금새 전설

대조사에는 신비스러운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황금새’ 전설이다.
겸익이 인도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후 흥륜사에서 번역작업에 몰두 할 때다.
어느 날 밤 꿈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불경 번역을 찬탄하고는 갑자기 큰 황금새로 변하여 임천면 가림성 위로 사라졌기에 겸익이 뒤쫓아가보니 그 새는 간 곳이 없고, 꿈에서 친견한 관음보살이 앉아 계시기에 놀라서 소리치며 꿈에서 깨어났다.
그런 꿈이 며칠 반복되자 겸익은 이 사실을 임천성의 성주에게 알렸다. 성주는 반신반의며 겸익대사와 산위에 올랐더니 전에 없는 황금 관음보살이 있었다.
이 사실을 나라에 알렸더니, 성왕이 크게 감동하였다. 마침 성왕이 협소한 웅진(공주)에서 넓은 소부리(부여)로 수도를 옮길 마음을 가졌던 터라, 그렇게 되면 가림(성흥)산성은 수도를 지키는 중요한 곳이 될 것이었다.
성왕은 그 자리에 국가안위를 비는 큰 절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성왕 5년 초파일을 기하여 공사를 시작하여 5년 만인 성왕 10년에 절을 지었다.
불사를 하는 동안의 밤에도 큰 황금새가 날아와 대낮같이 밝혀주어 불사를 일찍 마칠 수 있었다.
그래서 절 이름을 황금빛 큰 새가 나타났다 하여 대조사라 지었고, 관음보살이 나타난 절 뒤의 큰 바위에는 석불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 전남대 지리교육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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