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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 전 인도유학생 겸익(謙益)의 삶과 백제불교
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구법의 길 찾아 떠난 ‘겸익’ <하>

  • 입력날짜 : 2014. 06.05. 20:06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전남대 지리교육과 겸임교수 ① 당시 외국 가는 큰 배의 포구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황산포구 ② 겸익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무령왕 ③ 중국 남조의 문헌에 나오는 삼국의 사신 모습.
혜초 보다 200여년이나 더 일찍 인도에 간 백제의 ‘겸익’. 기록되지 않은 신화 속에 존재해 온 겸익의 행적은 눈부셨다. 인도에서 5년만의 귀국은 대대적인 환송을 받았고 많은 법어 불경의 번역과 함께 한반도의 수많은 중생을 구제와 화려한 불교문화 융성, 더 나아가 백제가 해양강국이 되게 했다.

▶ 인도에서 5년만의 귀국

겸익은 성왕 4년(526년) 웅진에 도착한다. 성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성문밖에 까지 나와서 마중했다. 어렸을 때 같이 컸고, 자기 아버지 무령왕의 후원으로 인도에 간 친구가 돌아 온 것이다.

겸익이 인도에서 가져올 불교경전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던 참이었다. 성왕은 새 깃으로 만든 우장을 입은 악대가 북을 치고 피리를 부는 환영행사를 벌였다. 두 사람은 5년 만에 다시 재회했고 ‘새로운 백제, 불국토의 백제’ 를 만들기 위해 의기투합했다.

성왕은 이들(겸익과 인도승려)을 흥륜사(興輪寺)에 거주하게 했고, 국내의 이름난 승려 28인을 불러 함께 가지고 온 율부(律部) 72권을 번역하게 한다. 당시 백제 고승들은 겸익을 도와 윤문(潤文-글을 윤색)과 증의(證義-링크)를 했으며,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이 이 율장에 대한 소(疏-주석) 36권을 지어 성왕에게 바쳤다.

이때 번역한 율은 ‘범본아담장오부율문(梵本阿曇藏五部律文)’ 또는 ‘비담신율(毘曇新律)’이라고 한다. 아담이나 비담은 아비달마(阿毘達磨)의 준말이지만 아비달마율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 겸익이 오르내렸을 ‘성흥산성’

겸익의 친구인 ‘성왕’은 그의 율장을 기초로 백제불교는 융성기를 이룬다.

성왕이란 본래 인도의 불교에서 신화적인 왕을 지칭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에서 가져 왔다고 한다. 겸익으로 인해 백제불교는 계율 중심의 불교가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성왕은 겸익이 가져온 지리지식을 바탕으로 543년 부남(扶南-현재의 캄보디아)과 교역했다는 것과 549년 중국 남조의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사실이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겸익의 계율 중심의 불교는 일본으로 전파되어 크게 꽃피게 된다.

성왕은 552년 일본의 서부희에게 달솔, 사치계 등을 보내는 한편, 금동석가상 1구와 미륵석불, 번개, 경론, 약간 등을 함께 보냈다.

또 554년에는 담혜·도심 등 16명의 승려들을 일본에 보낸다. 554년에는 일본에 보낸 물품 중 인도에서 산출되는 양모로 만든 탑등(taptan)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겸익이 인도에서 가져 온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특히 당시 일본에는 불교뿐만 아니라 학자와 기술자들을 비롯해 의사나 음악가까지도 파견해 선진 문물을 전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겸익이 인도를 다녀 온 뒤로 인도에 다녀온 스님들이 줄을 이었다.

‘해동고승전’에 따르면 신라의 혜업, 혜륜, 현각, 현태, 고구려의 현유 등이 인도에 다녀왔다. 그리고 이들이 있었기에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 불교는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 한반도 삼국은 겸익 이후 해외교류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여 진다.


▶ 해양지리 지식의 축적

대조사 뒤에 있는 산성으로 발길을 옮겼다. 겸익이 수 없이 오르고 내려 다녔을 가림산에 있는 성흥산성이다. 혹시 성흥이란 말은 성왕이 사비천도 이후 이곳을 중요시한 나머지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꽃망울이 지고 있다.

봄을 즐기기엔 더 없이 좋은 산길이다. 소소한 산책을 즐기기에 딱 좋다. 20여분을 오르니 산성이 보이고 정상이 나온다. 커다란 암벽과 가파른 급경사 길이다. 높이 260m에 불과한 산이지만 오르기에 쉽지 않다.

아래에서 보면 경사가 완만하고 토산으로 보여 쉽게 공략할 수 있게 보이지만 실제는 가파른 화강암으로 둘러싸인 요새였다. 당나라 유인궤가 겁을 먹을 만 했다(662년 백제 부흥운동 당시 이곳을 공격하던 당나라 장수 ‘유인궤’가 성이 견고해 두려워했다고 전해 온다.)

정상에 서니 멀리 남부여의 너른 들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바로 발아래 사도나루가 있다.

아마 저곳에서 겸익이 배를 타고 인도로 갔을 것이다.

한편으론 백제 멸망의 슬픈 장면을 간직한 포구다.

서해 바다도 보인다. 멀리 굽이굽이 백마강이 흐른다. 최고의 요충지다.

적당한 운동을 하고 나서 그런지, 내려올 때는 몸이 풀리고 개운했다.


‘황산포구’

백제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백마강 나루터 중의 하나다. 건너편 사도나루와 맞닿아 있다. 사도나루에서 15㎞ 정도 가면 부여가 나온다. 황산포구는 이웃하는 강경장터와 더불어 한 때 우리나라 3대 시장 중의 하나로 꼽힐 만큼 번성했던 포구다.
일본과 중국 바다를 횡단하는 큰 배는 이 곳이 선착장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곳을 지나면 암초가 많고 좁아진 강폭에 물살이 세지기 때문이다. 당나라 소정방 함대가 정박한 곳이다. (백마강은 부여 역사지구를 지나는 금강 구간 16㎞를 말한다.)
황산포구가 있는 황산리는 계백장군의 5천여 결사대가 장렬히 싸웠던 ‘황산벌’ 이기도 하다.
이곳은 웅어회가 별미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관광지로 변해 있다.
웅어회는 백제 말기 의자왕이 봄철에 입맛을 돋우기 위해 즐겨 먹었다고 전한다. 그 후 당나라 소정방이 먹고 싶어, 강에 그물을 가득쳐도 잡히지 않아 의어(義魚)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의자왕이 당나라로 잡혀갈 때 “웅웅”하고 슬프게 울었다고 전한다. 그 뒤로 웅어는 유명하게 되었고, 웅어회가 특산물이 되고 식당들이 즐비하게 들어섰다고 한다.


성흥산성과 사랑나무 (옆으로 구부러진 가지와 땅이 ‘하트모양’을 이루고 있음)
‘성흥산성’

성흥산성은 충남 부여군 임천면 가림산(260m)에 위치해 있다. 둘레 1천500m, 높이 3-4m로 산 꼭대기를 중심으로 테두리 형식으로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사적 제4호로 지정돼 있다.
산성에는 남문, 북문, 서문, 보루, 창고, 우물 등의 터가 남아 있다. 동성왕 23년(501)에 쌓은 석성이다. 백제산성 가운데 유일하게 축성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비(부여)와 직선거리로 10㎞ 남쪽에 위치해 있고, 금강 하류 일대를 관측할 수 있는 요충지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위직인 위사좌평이 이 성을 담당했다고 한다.
이는 이 성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오랜 역사적 성답게 겸익 외에도 많은 영웅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산 정상은 넓다. 우물과 군창터가 남아 있고,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서 있다.
특이하게도 옆으로 구부러진 가지와 땅이 ‘하트모양’을 이루고 있어 ‘사랑나무’라 불리게 되었다. 이곳에서 사랑을 고백하면 이뤄진다는 소문이 퍼져있다. 서동요, 대왕세종, 바람의 화원, 천추태후, 신의 등 각종 사극 촬영지로 이용된 후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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