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25일(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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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년 전 또 하나의 고려, 중국의 ‘완평현’
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해양 실크로드의 중심지 ‘베이징’

  • 입력날짜 : 2014. 07.03. 19:40
① 대도성이 있었던 ‘완평현의 거리’ 모습. ② 현재 사용되고 있는 주소(대고력장 78번지)에서 ‘고려촌’이었음을 알 수 있다. ③ 고려인이 완평현 지수촌에 불당을 창건했다는 기록. ④ 당시 고려인들이 들어 온 통로 ‘통조우’.
중국 베이징(북경)은 원·명·청시대에 이르기까지 육로 뿐만아니라 해로 실크로드의 최대 중심지였다. 당시에는 한반도 고려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현재 중국 북경에서 서쪽으로 15㎞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완평현’. 이곳은 700년 전 원나라 시대에 형성된 또 하나의 ‘고려(高麗)’였다. 그렇다면 이 ‘완평현’은 어떤 곳 인가? 이를 직접 보기 위해 지난 6월12일 그곳에 다녀왔다. 마침 칭화대 연수프로그램에 참여 중이어서 짬을 낼 수 있었다.


‘완평현’은 어떤 곳 이었는가? 대도는 원나라 수도였다. 즉 대도성(大都城)이 있었던 곳이다. 원나라 시대의 대도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을 뿐만아니라, 세계 각국과 교역이 이뤄지는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세계 각국에서 들어오는 각종 문물로 넘쳐났으며, 각국의 사절단과 상인들이 끊임없이 들어오는 다국적 도시였다.

이러한 명성은 그 후에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이 곳에서 동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현재의 자금성((紫禁城)이 세워지고, 수도가 그곳으로 옮겨지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천안문 형성과 함께 역사 속에서 사라졌으나 이민족들의 생활은 한동안 그대로 이어져 갔다.

아직도 원나라 당시 축조했던 성곽(城郭) 흔적이 남아있다. 성곽 주변의 구시가지에는 오랜 역사의 흔적으로 느낄 만큼 고풍스러운 주택들과 도로 모습이 즐비해 있어 지금도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고 있다.

당시 완평현에는 고려인들이 매우 많았다. 현재도 이곳에는 당시 고려인들이 모여 살았던 집단거주 흔적이 남아있다. 집단거주지는 고려와 정치적으로 가까웠던 원나라 시대에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현장기록물에 집집마다 대문 위에 붙어있는 마을 이름의 흔적이 그것이다. 원래는 고려장촌(高麗匠村) 이었으나, 명나라 때 고력장(高力匠村)으로 개명돼 현재는 고력장으로 명패가 붙어 있다.

“이 지역을 뭐라고 부르나요?” “고리장촌입니다”. “예전에는 이곳을 뭐라고 불렀나요?” “고려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이 지역을 언제부터 고려장이라 했습니까?” “정확한 유래는 모르지만, 지금도 고려장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마을이 처음 형성될 때, 아마 많은 고려인이 이곳에 거주했던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 마을명칭은 보통 어떤 종족이 많이 거주하고 또 어떤 성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원나라 때 고려인들이 집단적으로 살았던 고려인촌이 이곳임에 틀림없다.

고려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문헌서원이 있다. 고려 말 대문장가 이곡과 이색의 위패를 모시는 서원이다.

얼마 전 방영된 모 방송국의 역사스페셜에서 이곡이 원나라의 관직생활을 할 때 남겨놓았던 목판 중 완평현 고려촌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발견됐다는 내용이 소개됐다. 불당을 창건했다는 것이다. 절(사찰)은 고려인들의 정신적 안식처이자 구심체 역할을 하던 곳이다. 무슨 이유로 이 곳에 절을 세우고 고려촌을 만들었을까?

드라마에서는 당시 원나라와 고려는 통혼관계고, 혼인할 때 많은 고려인들이 국왕을 따라 이곳으로 와 오랫동안 머무를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상당히 많은 고려인 2-3대가 살게 되었다고 했다. 최소한 원 간섭기인 70여년 동안은 그랬다.

원 간섭기인 70여년간 이곳에는 고려인촌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 박 교수에 의해 알려진 우리나라 최초의 이슬람교도인 ‘라마단’도 이 때의 고려인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대도로(大都路) 완평현(宛平縣) 청현관(靑玄關)’ 사람으로, 원 황제에 의해 능력을 인정받아 현재 중국과 베트남 경계 지역의 장족자치구에 속하는 ‘광서도(廣西道) 용주(容州) 육천현(陸川縣)’이란 변방의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임명돼 벼슬을 지내다, 현재 광조우 이슬람 성지(淸眞先賢古墓)에 묻혀있다는 사실이 그의 비석에서 발견돼 알려졌다.

그렇다면, 완평현에 고려인들이 어떤 경로로 들어왔을까? 당시 황해로부터 들어오는 관문에 해당된 곳이 ‘통저우(通州)’였다.

통저우는 중국 대운하(항조우-베이징, 2천700㎞) 뿐만아니라 백강을 통해 황해바다로 이어지는 대도성 제1의 관문이었던 것이다.

현재 베이징의 동쪽 40㎞ 지점에 위치해 있다. 퉁저우에 있는 장자완은 원·명·청시대에 이르는 동안 관문역할을 수행했던 물류집결지이자 교통의 최고요지였다. 동으로는 ‘백하(白河)-발해-황해’를 통해 고려와 일본으로 바닷길이 연결되고, 남으로는 남중국해로 연결되어 있어 대도성으로 오는 모든 물자들은 이곳으로 운반되어 내륙운하로 전달됐다.

원의 대도(大都)가 건설될 때도, 후에 명의 북경(北京)이 건설될 때도 필요했던 석재와 목재, 그리고 남방물자들이 모두 이곳을 통해서 오게 되었다. 당시에 이처럼 좋은 지리적 위치의 인문환경 탓에 장자완 마을은 독특한 문화적 분위기를 지니게 되었다. 소설 홍루몽 등에서도 이곳의 분위기를 차용하기도 했다.

장자완 마을에는 그 세월만큼이나 많은 문화재가 있다. 요나라, 명나라 시대의 통운교(通運橋)와 강변에 솟아 있는 옛 성벽(古城), 600년 세월의 노거수, 대운하 물길유적, 조운거석(漕運巨石), 천근석근(千斤石權), 창고건물(루미창, 난신창, 베이신창) 등 아직도 그 때의 흔적이 남아있다.

얼마 전 이들 문화재를 ‘조운문화주제공원(通州運河公園)’으로 조성해 넓은 강변 생태공간으로 꾸며 놨다(총 면적 368만㎢에 달하는 현재 북경 동쪽에 가장 큰 도심공원).

그리고 복원된 조운부두(漕運碼頭, 차오윈마토우)에서는 얼마 전 TV드라마 ‘조운부두’의 촬영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당시 통저우에는 세계 각국의 선박들이 정박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근접한 거리에 있던 고려 선박들이 당연이 수적으로 많았다. 특히, 원나라 시대에는 고려와 정치적으로 가까웠던 관계로 고려 선박의 왕래가 빈번했다.

원나라 이래로 많은 고려인들이 이곳에 밀집해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고려의 문화를 씨 뿌리며 살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곳 완평현은 또 하나의 고려였던 것이다.

때문에 이곳을 방문할 때면, 곳곳에서 고려인의 채취를 느낄 수있다. 한편으로는 고려와 관련된 유적이 대량으로 묻혀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돌아오는 길에 차창 너머로 보이는 ‘항일투쟁기념관’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이곳에 건립돼 있는 이유가 예사롭지 않게 여겨졌다. 항일에 대한 우리 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 아닐까!

한·중 합작으로, 이곳에 널려 있을 고려인의 흔적을 찾아 고려인촌을 복원해 민족적 자긍심을 심고, 중국정부는 관광 수익을 얻는 공조체계를 갖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고려인 이슬람교 묘비 탁본
우리나라 최초의 이슬람교도인 ‘라마단’

14세기 한 고려인이 이슬람교에 귀의했던 사실을 보여주는 묘비가 발굴됐다.

순천향대 박현규 교수(한중문화교류사)는 지난 2002년 12월 중국 광저우시 해방북로(解放北路) 계화강(桂花崗)의 이슬람교도 묘역인 청진선현고묘(淸眞先賢古墓) 부근에서 ‘라마단’(剌馬丹)이라는 이름의 고려인 이슬람교도 묘비를 찾아냈다고 2003년 8월29일 밝혔다. 묘비 원본은 현재 광저우시에 위치한 이슬람사원 회성사(懷聖寺)에 보관돼 있으며 광저우박물관에는 복제품이 전시돼 있다. 이 라마단 묘비석은 높이 62.0㎝, 폭 42.0㎝, 두께 6.2㎝로 정면에는 이슬람 경전인 ‘코란’ 제2장 255절이 아랍어로 크게 새겨져 있다.

비석 우측면에서는 ‘대도로(大都路) 완평현(宛平縣) 청현관(靑玄關) 주인 라마단(刺馬丹)은 고려 사람이다. 나이는 38세로 지금 광서도(廣潟) 용주(容州) 육천현(陸川縣)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임명되었다’는 글귀가 확인됐다.

비문을 분석한 박 교수는 “고려 출신 ‘라마단’은 지정 9년(1349년) 3월23일에 사망해 그 해 8월18일에 광저우 북쪽 계화강에 묻혔다”며 “그가 다루가치가 된 것으로 보아 원에서 상당한 배경을 지닌 고려 유력 집안 출신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또 “이 자료는 고려인이 이슬람교도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며 “기록상으로는 라마단이 한민족 최초의 이슬람 신도라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중국역사학계는 이 묘비가 중국과 이슬람의 해양실크로드 교류를 직접적으로 증명해주는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전남대 지리교육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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