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21일(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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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 역사의 무역항…동서양 잇는 해상실크로드 시발점
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중국의 신해양실크로드 거점, 광저우 (1)

  • 입력날짜 : 2015. 08.27. 19:01
젊음과 활기가 넘치는 최대의 번화가인 북경로 모습.
2천여년 전부터 무역항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광저우는 동서양을 잇는 해상실크로드의 중요한 시발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2천년 이후, 한 번도 폐쇄된 적이 없는 유일한 중국의 항구이다. 명청의 해금정책 때에는 ‘황제의 남쪽 보물창고’로 불릴 만큼 경제적 번영을 이뤘다. 때문에 광저우에는 도처에 해상실크로드 관련 유적이 남아 있다.
남인도의 향지국에서 뱃길을 통해 광저우에 처음 도착한 달마의 흔적이 남아있는 서래초지(西來初地), 인도양을 건너온 이슬람 상인들이 세운 중국 최초의 모스크 회성사(懷聖寺), 중국에 지어진 성당 중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하는 석실(石室)성심성당 등이 대표적이다. 이번 호부터는 광저우의 소개로부터 이러한 우리 한민족이 남긴 흔적을 더듬어 보는 답사기를 싣는다.

▶ 날로 급변하는 ‘광저우’
우리 인천공항을 빼닮은, 특색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광저우 공항’을 빠져나왔다. 미리 연락받은 현지 사장의 비서가 차를 대기시켜 놓고 통역원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붙은 택시 호객꾼이 머쓱하게 쳐다봤다.

시내로 이어지는 창밖의 경관은 여느 도시와 흡사했다. 고층빌딩, 아파트, 고가도로 등이 이어졌다. 교통체증이 무척 심하다. 어제 오늘 다르게 심해진단다. 공기가 무척 안 좋다. 공장들이 오염된 공기들을 그냥 보낸다고 한다.

중국을 몇 번 다녀온 사람들이 광저우를 다녀와서 하는 말은 똑같다. “갈 때마다 너무 빨리 변해 깜짝 놀란다”고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중국은 우리를 뒤쫓는 형태였는데…. 광저우는 다이내믹 하고 요동치는 도시 중 하나란 것이다.

▶ 2천년이 넘는 ‘고도(古都)’

광저우는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원래는 마바인, 봉계인, 하암인 등 원주민들이 흩어져 부족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고대에는 ‘백월(百越)’이라 불려졌다. 그러던 것이, 이곳에 2천100년 전에는 ‘남월국(南越國)’이 세워졌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부하 ‘조타’에게 10만대군을 줘 최초로 이 지역을 지배하게 했다. 그리고 남해군 ‘번우현’을 설치했다. 그러나 진나라가 10년만에 망하자, 조타는 독립국인 ‘남월국’을 세웠다. 남월국은 BC 111년부터 5대에 걸쳐 93년 동안이나 존속했다. 길지 않는 역사였지만 해외무역을 활발히 해 부강했다. 전성기에는 베트남까지 차지할 정도로 세력이 컸다.

왕능에서 출토된 물건들은 당시 화려한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월수공원 끝자락에 남월의 2대 왕 ‘조말의 묘’가 있었다. 1983년에 호텔공사 중에 우연히 발굴됐다고 한다. 출토품을 전시한 박물관 서한남월왕묘박물관(西漢南越王墓博物館)이 함께 세워져 있었다. 박물관은 실제 무덤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연계돼 있었다. 관내에는 2천년 전의 역사를 보여 주는 귀중한 유물들은 하나같이 당시의 발달했던 사회상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시신을 안치한 후, 다시는 못 들어가게 되는 ‘자동으로 잠기는 돌문’기법으로 여태 도굴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기술 아이디어를 보니 놀라웠다. 순장제도도 놀라웠고, 아라비아 수입품인 은향과 약그릇도 놀라웠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사루옥(옥의로 만든 수의)’이 가장 돋보였다. 1천191개의 옥과 붉은 비단실로 만들어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놀라웠다.

▶ 없는 것이 없는 ‘시장’

날씨는 매우 습하고 덥다. 짝퉁이 많다는 뒷골목으로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밀려든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유럽, 미국이 주 고객 층이라니…. 짝퉁 수요는 엄청난 것 같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광저우 ‘짝퉁시장’은 보통 ‘꾸이화강’에서 시작됐다. 차에서 내리자, 큰 쇼핑몰이 하나가 들어온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대놓고 짝퉁을 진열해 놓은 상점은 별로 없었다. 중국 당국에서도 짝퉁에 대한 단속이 심해서, 개별문의를 하면 개별매장으로 인도하는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을 모르면, 내부만 대충 둘러보고 나온다. 건물 안은 단속이 심해서 그런지, 노상에 짝퉁을 내놓고 파는 행인을 많이 볼 수가 있다. 바로 앞길 노점에 백화점에서나 봤음직한 각종 짝퉁이 진열돼 있었다. 명품을 잘 몰라서 그런지, 얼핏 보니 다 A급 진품 같이 보였다. 주변에 명함을 가지고 치근덕거리는, 소위 말하는 삐끼들도 상당히 많이 보인다. 명품을 좋아하는 여성이라면 한 번쯤 들려볼만한 곳이다.

그렇다고 메이커나 명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규모가 대단했으며, 넘쳐났다. 한 품목으로 우리 남대문 시장만한 것이 30여개소가 넘었고, 각 시장마다 산더미처럼 메이커와 일반상품을 다양하게 팔고 있었다.


▶ 다양한 식재료의 ‘요리’

광저우의 특색이 ‘요리’라고 한다. 광저우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음식체험’이다. 그 유명한 ‘광동요리’의 본산이기 때문이다. 음식 종류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뱀이나 쥐 등 혐오식품부터 상어지느러미, 곰발바닥, 제비집 등 고가음식까지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해산물 식당에 들어가니 그렇게 큰 조개를 처음 봤다. 음식이라기보다는 좀 징그럽고 무섭기까지 했다. 온갖 종류의 생선과 횟감들이 끝없이 진열돼 있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바깥쪽 테라스에 가 앉았다. 큰 건물 전체를 식당으로 쓰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단일 규모로 이렇게 큰 식당을 본적이 없을 정도였다.

돌아다니면서 느낀 것인데, 시내에서는 무수히 많은 음식점에서 세계 각국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많은 맛집도 있다. 식당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유명 맛집에서 밥을 먹으려면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광동요리가 모두 우리 입맛에 맞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점심 때, 중국인 식당에서 ‘만두’를 시켰는데, 모양은 예쁘지만 심한 향채에 비위가 상했다. 만두피는 정말 찰지고 맛있었는데 소스는 전혀 아니었다.

▶ 발달하고 있는 ‘코리아타운’

타국에서 먹는 한국음식은 정겹고 맛있다. 중국여행뿐만 아니라 해외여행 할 때 가장 그리운 것이, 뭐니 뭐니 해도 한국 음식이다. 저녁식사로 코리아타운인 ‘웬징루’를 찾았다. 차에서 내리자 여기 저기 눈에 띄는 한국어 간판이 코리아타운 임을 말해준다. 코리아타운을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 어느 나라를 가던지 ‘대장금’ 간판은 꼭 볼 수가 있는데, 이곳에도 역시나 있었다. 코리아타운은 언젠가부터 형성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한 거리를 온통 한국적인 거리로 변모시키고 있었다. 해가 갈수록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제 중국에서도 한국음식은 인기 있는 고급음식으로, 한국인보다 더 많이 찾는다고 한다. 삼겹살, 된장찌개, 라면사리, 김치전…. 아 정말 외국에서 가끔 먹는 한식은 대충 한 음식이라도 맛있는 것 같다. 음식 나오는 양이 역시 대륙스럽다. 생선 토막 썰 듯이 삼겹살을 토막 내어 구어 왔다. 마무리로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청도맥주를 시원하게 마셨다. 한국 사람은 아무리 좋은 재료의 외국음식보다, 소박하지만 우리가 즐겨먹는 한식을 먹어야 힘이 나는 법인가 보다. 밖으로 나오니 밤공기가 힘을 솟게 했다.

▶ 젊음과 활기가 넘치는 ‘북경로’

광저우 1번가, 바로 북경로이다. 광저우의 가장 화려한 곳, 서울로 따지면 명동 정도 되는 곳이다. 중국인들과 관광객들로 항상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각종 쇼핑시설과 식당들이 몰려 있고, 길거리 노점도 명동과 비슷하다. 백화점도 여러 개 있었다. 그 중에 천하백화점이 눈에 띄었다. 한번 들어가 봤다. 명품 코너에 사람이 넘쳤다. 밖으로 나오니 밤의 북경로는 빨간 네온사인으로 뒤덮여 있었다.

오늘도 광저우는 여타의 다른 대도시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토해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모습이다. 큰 대륙 중국 광저우 북경로 정중앙! 오늘하루 정말 많은 사람에, 그리고 붉은 색에, 그리고 그들의 유쾌한 웃음소리에 한껏 취해 버린다.

예부터 중심지였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한쪽 도로변에는 공사 중에 발굴된 옛 시가지 모습을 유리관 속에 보존해 놓았다. 당나라 시대부터 송원대와 명청시대를 지나 시기별로 표시가 돼 있어 흥미로웠다. 역사를 하나의 관광자원화 하고 있었다.

긴 역사를 지닌 광저우 시내는 함부로 땅을 못 판다고 한다. 어디든 유물창고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구시가지에는 고충건물 보기가 어려웠다.



※광저우 역사

광저우는 2천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또한 광저우는 개항 이후 한 번도 폐쇄된 적이 없는 유일한 중국의 항구였다. 때문에 광저우에는 도처에 해양실크로드 관련 유적이 남아 있다.

고대에는 ‘백월(百越)’이라 불렀다. 진나라 때 남해군의 ‘번우현’을 설치했다. 진 멸망 후 한때 조타(趙 )가 ‘남월국(南越國)’을 세워 5대조까지 독립국으로 존속했다. 그러나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때에 망하고 ‘교주(交州)’로 불렀다.

광저우는 고대로부터 무역 중심지로서 발전했다. 일찍이 한(漢)나라 때부터 해외무역을 시작했다. 해상실크로드가 활성화된 당송 때 급속히 발전했다. 페르시아와 아라비아까지 교역했다. 이미 당나라 때에 많은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이 들어 와서 그들의 거주지가 형성됐다.

문병채 ㈜ 국토정보기술단 단장
명의 해금정책 때에도, 광저우만은 개방됐다. 명나라 때도 남해제국의 조공선 입항지가 됐고, 중앙정부의 중요한 수입원 역할을 했다. 명말(明末)부터는 유럽 각국과 교역이 크게 확대돼 ‘중국 최대의 무역항’으로 번성했다. 청대에도 역시 광저우만을 개방했다. 광저우는 ‘공무역’의 중심지로 서양세력과의 ‘교류창구’가 됐다. 청나라 때는 ‘황제의 남쪽 보물창고’로 불릴 만큼 경제적 번영을 이뤘다.

1841년에는 영국의 무역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인도에서 ‘아편’을 보급한 것을 빌미로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후, 홍콩의 할양으로 광저우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1만t급 이상의 선박 접안이 가능하며, 매년 가을에 개최하는 박람회에는 세계 각국의 상사들이 모여들고 있다. 1911년에는 손문(쑨원)이 ‘광저우 봉기’를 일으켜 ‘신해혁명’의 시발점이 됐다. 위안스카이가 죽은 뒤, 쑨원은 1921년 중화민국 대통령이 돼 광저우에 임시수도를 설치했다. 물론 1925년 손문이 죽은 뒤, 장개석의 국민당은 공산당과 갈라졌고, 장개석은 1928년 수도를 난징으로 옮겼지만 시발지는 광저우였다.


kj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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