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8일(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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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의 흔적과 향기를 찾아서…광저우 서래초지에 가다
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해상실크로드 최대 거점 ‘광저우’ (2)

  • 입력날짜 : 2015. 09.10. 18:50
달마대사가 서래초지 옆에 세웠다는 화림사. 어마어마한 크기의 달마대사 상, 얼굴과 표정이 각기 다른 오백 나한상, 절 앞뜰에 세워져 있는 석탑과 고목.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
옛 정취가 스며있는 주강(珠江) 위의 고도(古都)! 2천년 전 개항 이래, 단 한 차례도 폐쇄된 적이 없었던 항구! 명나라 해금정책 때도, 중국 모든 해안이 봉쇄되던 청 말기 때도 문을 열었던 유일한 항구…. ‘황제의 보물창고’로 불렸던 중국 해상실크로드의 시작점, 광저우! 정말 ‘보고 느낄 곳이 많은 도시’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낯설지만은 않은 곳이다. 혜초가 인도로 떠난 곳이며, 우리 선불교(조계종)의 고향이고, 근세에는 ‘광복군’이 활동한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리라. 이들의 흔적과 향기를 더듬어 보고자, 무더위가 극성을 부린 올여름을 그곳에서 보냈다.


▶ 혜초가 금강지(金剛智)와 만나다
719년 혜초가 이곳에 도착한다. 달마대사가 도착한지 200년 후였다. 당시 이곳에는 인도, 특히 남인도에서 많은 스님들이 와 있었다. 금강지(金剛智, 671-741) 스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금강지는 중국에 밀교(密敎)를 전한 스님이다.

인도 중부의 마라야국(摩羅耶國)에서 태어나, 10세 때에 나란다사(寺)에 들어가 스님이 됐던 자이다. 31세 때 남인도에 가서 용지(龍智)에게서 밀교를 배웠고, 716년경 인도를 출발해 719년 광저우에 도착, 이듬해 장안으로 들어가 황제의 칙령으로 대자은사(大慈恩寺)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 무렵, 719년 중국에 도착한 혜초는 장안에서 금강지를 만났고, 그로부터 밀교를 배우게 된다. 3년이 지난 후, 723년 20세 약관의 나이에 그의 권유로 인도로 가게 된다. 금강지는 혜초에게 그가 온 길을 역행해 인도로 가는 방법을 자세히 들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광저우로 가서 먼저 금강지 소개장을 들고 서래초지의 절(화림사)를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당시 인도에서 온 많은 스님들이 머무르고 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서역의 배가 닿았다는 고대 포구 ‘서래초지’<왼쪽>와 달마대사가 팠다는 우물 ‘오안정’.
▶ 인도 가기 위해 서래초지로 가다
‘서래초지(西來初地)’는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 등 서역인들이 중국에 처음 닿았던 ‘광저우의 옛 포구’였던 곳이라 한다.

이곳에 절(화림사)이 세워진 것은 달마대사와 관련이 깊다. 521년 인도 달마대사가 해상실크로드를 떠나 중국에 와서 이 곳에서 배에서 내렸다고 한다. 이곳에 도착한 달마는 ‘서래암(西來庵)’을 짓고, 선불교 전파기지로 삼았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이곳을 ‘서래초지’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서역에서 처음 도착한 곳’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곳은 1천500년의 역사를 지닌 불교성지임과 동시에, ‘중국 선종의 시원지’이기도 하다.

오늘날 화림사는 광효사, 육용사, 해당사와 함께 광저우의 4대사찰로 꼽힌다. 다른 사찰에 비해 덜 알려지고 규모도 작지만, 달마대사가 중국에 처음 발을 디딘 역사적인 장소로서 중국불교에서 화림사가 차지하는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다. 서래암은 현재 화림사(華林寺)로 바뀌었다.

▶ 아직도 서역의 향기가 남아 있다
서래초지는 옛날에는 주강 하천변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주위가 온통 광저우의 유명한 ‘보석전문시장’이어서, 시장 안에 있다고 해야 옳다.

서래초지에 도착한 서역인들이 머무는 절(화림사)는 규모는 다른 곳에 비해 작지만 달마대사를 모신 법당에 가 보니, 달마의 불상이 정말 크게 모셔져 있었다. 다른 쪽에는 달마대사의 형님인 ‘달계대사’의 불상도 모셔져 있었다. 달계대사는 셋째 동생인 달마를 찾으러 인도에서 이곳 광저우에 오셨고, 이곳에서 달마를 만났다고 전해진다. 그 후 달마가 북으로 가자, 이 절에서 3년 동안 2대 주지로 계셨다고 한다. 또한, 달마가 창시한 중국선종의 3조인 숭찬스님과 6조인 해능스님도 이 사찰에서 기거했다고 한다. 이 절은 중국과 외국 간 문화 교류의 중요한 역사현장이자 중개지였던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사찰 지붕에 용이 하늘을 날을 것 같은 모습이 특이했다. 웅장하고 너무 컸지만 ‘촬영은 금지’라서 아쉬웠다. 그래도 살짝 담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엽서사진을 사는 것으로 만족했다.

오백 나한을 모신 법당은 웅장하고 대단했다. 같은 모습이 없어 불상 미술관에 온 느낌이었다. 헌데, 모두 늙은 모습들을 하고 있는 것이 독특했다. 관리하는 분들 눈을 피해 카메라로 몇장을 담았다.

절에서 나와 조금 뒤로 가니, 달마대사가 스님들과 함께 팠다는 ‘오안고정(五眼古井)’이라는 우물, 대사가 물에 비친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물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문자만 새겨져 있었다. 보석시장으로 변해버린 옛터에 고성방가로 외쳐대는 장사꾼 소리만이 들려왔다.

▶ 당시 광저우는 국제도시였다
인근에 이슬람 상인들이 세운 중국 최초의 모스크 ‘회성사(懷聖寺)’, 광저우가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다는 대사찰 광효사 등이 있어,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들을 돌아보고, 당시 광저우에는 서역(인도) 뿐만 아니라 이슬람인들도 많이 와 있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서역 스님들이 머물고 있던 화성사, 이슬람 신도들이 머물고 있던 회성사가 대표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광저우 최대의 사찰이었던 광효사는 200년 전에 달마에 의해 전해진 중국선종이 6조 혜능에 의해 꽃을 피우고 있어서, 남인도 선종 승려들이 많이 와 있었다.

이러한 곳에, 20세의 청년 혜초가 이곳을 왔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 본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이곳을 오가는 서역의 배들이었을 것이다. 혜초가 호감어린 눈빛으로 바라봤을 낮선 모습! 처음 접하는 서역과 이슬람 문화! 혜초는 그 때, 이슬람 지역까지 가 보고자하는 꿈을 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광효사(廣孝寺)를 방문한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정수일 소장은 “혜초가 천축으로 구도의 길을 떠나기 전 이곳에 주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혜초(704-787)는 누구인가?

신라 성덕왕 때인 719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광저우(廣州)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671-741·바즈라보디·Vajrabodhi)를 만났다. 금강지는 남인도 출신이다. 그는 인도 중부의 마라야국(摩羅耶國)에서 태어나, 10세 때에 나란다사(寺)에 들어가 스님이 됐다. 31세 때 남인도에 가서 용지(龍智)에게서 밀교를 배웠다. 716년께 인도를 출발해 719년 광저우에 도착, 이듬해 장안으로 들어가 대자은사(大慈恩寺)에 거주했다. 제자에 불공(不空)·혜초(慧超)·원조(圓照) 등이 있다.

혜초는 그에게서 밀교(密敎)를 배웠다. 그리고 그의 권유로 인도로 갔다. 당시 723년 20세 약관의 나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상실크로드를 따라 인도에 간 그는 불교유적을 두루 순례하고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일대까지 답사했다.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 것은 30세 전후로 추정된다. 733년 중국 장안의 천복사(薦福寺)에서 스승 금강지와 함께 밀교를 연구했다. 780년께 중국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787년에 입적했다.

그의 여정의 기록은 1908년 중국 둔황에서 발견됐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견줄 만한 귀중한 유산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앞부분이 소실된 결락본으로 발견됐다. 그래서 첫 부분이 인도 내륙지방부터 시작돼 혜초가 어떻게 인도에 갔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왕오천축국전에 기록된 각국의 지명이나 풍습, 그리고 동식물의 이름까지 다양한 단어들이 나오는 ‘일체경음의’(당나라 혜림이 편찬한 불교용어사전, 제100권에 왕오천축국전에 나오는 어려운 글자나 어구를 설명)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어서, 그의 행로를 추측할 수 있게 했다. 이를 근거로 광저우에서 해상실크로드를 따라 인도로 들어 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kj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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