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기 전남도립대 교양학부·문학평론가

얼마 전 일이다. 70대 아파트 경비원이 관리자의 갑질 행태를 폭로하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경비원의 안타까운 소식은 단지 이번만은 아니다. 작금에 처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는 듯해 가슴 아프다. 이제 갑질의 주체는 대기업과 재벌가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반 직장은 물론 일상 속에 널리 퍼져 일종의 사회현상으로 굳어버렸다.

‘갑질’은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권위주의적 문화가 그 원인으로 꼽힌다.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달리 수직 계통의 서열 문화가 뿌리 깊이 박힌 문화 심리적 특성이 있다. 특히 나이나 계급, 직위, 재산에 따른 서열 문화가 강해 선·후배는 물론 심지어 부모·자식 사이에서도 알게 모르게 ‘갑질’이 빈번히 일어나는 이유다.

우리가 갑질 문화에 대해 사회적 심각성을 처음 느낀 건 ‘땅콩 회항 사건’일 게다. 그때는 갑질 문화에 대한 깊은 생각보다는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지?’라는 정도였다. 그러나 갈수록 다양화된 갑질 문제는 언론을 통해서 속속 드러났고, 그러한 갑질의 행태는 최근 들어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할 만큼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돌이켜보건대, 갑질이 사회적으로 이슈화될 때마다 우리는 항상 갑에만 초점을 맞췄다. 을은 대부분은 피해자로서 불쌍하다는 정서적인 위로는 받지만, 그들의 입장이나 심리적 관점에서 분석하려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심리학계에 따르면 ‘갑질’은 대부분 잘못 형성된 자존감에서 기인한단다. 이런 건강하지 못한 자존감은 상대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되면 불같이 화를 내거나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자존감은 높고 낮음보다 어떻게 형성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개인의 기질, 성격, 성장 과정을 통해 건강하게 형성된 자존감은 대인관계에서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재력이나 지위와 같이 사회적 평가 요소들로 인해 형성된 자존감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이나 다름없다.

이제라도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할 것은 갑을(甲乙) 관계의 본질이 아니라, 갑질의 문제여야 한다. 갑질을 하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갑을 관계 자체까지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본래 집단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문화에서는 자신의 위치나 역할에 매우 민감하다. 그래서 개인적인 관계보다는 전체 안의 작은 존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코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은 게 모든 인간의 생리다. 그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갖고 있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보다, 개인적인 관계에서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더 중요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갑질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너, 나 무시하지?’,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인식이 강하게 깔려있다.

갑질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궁극적으로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존재감을 타인과의 관계가 아닌, 자기 스스로에게서 찾는 것이다. 이와 함께 사회 전반의 인권 의식 함양 문제도 중요한 요소다.

이런 가운데 반가운 소리가 있다. 경기도 오산시를 비롯해 몇몇 지자체가 매월 특정 일을 ‘상호존중의 날’로 지정한 모양이다.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한 갑질 문화 근절에 불쏘시개가 될 것으로 믿는다. 정부도 나서서 판을 키울 일이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똑같은 존엄과 권리를 갖는다’라는 프랑스 인권선언문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모든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기에 평등해야 한다. 이게 민주주의의 기본이자 숭고한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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