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4일(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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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정도 1천년]제2부 천년의 인물-(11)매천 황현
‘한일합방’에 분개…스스로 목숨 끊은 ‘우국지사’
34세 장원급제·벼슬 버리고 구례 ‘구안당’서 은거
“개화의 참 의미는 정신적 풍요와 인간 개발” 주장
영호남 선비 성금모아 우국충정 담은 ‘매천집’ 출간
외세 저항 기록 매천야록 등 저서…3천여수 시 남겨

  • 입력날짜 : 2017. 07.04. 19:58
구례읍에서 천은사 방향으로 8km거리의 구례읍 광의면 수월리에 자리잡고 있는 매천사는 황현(1855-1910)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오른쪽은 매천 황선생 묘정비.
매천 황현은 조선 후기 우국지사인 학자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자 운경(雲卿), 호 매천(梅泉)이다. 1855년 12월 11일 광양에서 출생했다.

세종 때 명재상으로 덕망이 높은 황희 정승의 후손이다. 몰락한 시골선비 화이묵과 풍천노씨 사이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비록 양반가는 아니지만 선조의 후광이 지역사회 내에 암암리에 작용해 15세때 이미 조선 후기의 거유 노사 기정진을 비롯, 몇몇 선비들이 기억해 줄 정도였다.

1883년 매천은 부모의 권유에 따라 특별보거라는 과거시험에 응시했다. 시험문제는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적어내라는 것이었는데, 시험 관리들이 모두 깜짝 놀랄 정도로 내용과 문장이 탁월했다. 모두가 1등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시골 출신이란 이유로 2등을 했다. 매천은 격분해 귀향했다.

그는 광양에서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 구례군 만수동으로 이주해 자리를 잡고 독서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벼슬을 안 해도 좋으니 과거에 합격해 집안의 체통을 세우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뜻을 받들어 생원 회시에 응시, 장원급제해 성균관 생원이 됐다. 이때 나이 34세이니 만학이다.

매천 황현의 초상화
매천은 벼슬에 생각이 없었다. 이 땅이 처한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프고 답답해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구례로 낙향해 구안당(苟安堂)이라고 이름 지은 집에 은거했다.

매천은 개화라 해서 외국문물만 급급하게 들여올 것이 아니라, 그 근본인 정신적 풍요로움과 인간의 개발에 참 의미를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화라는 의미가 정신적 사회윤리를 무시한 물질화의 진행이 아니라 진정한 사회윤리의 회복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개화라는 이름 아래 외세를 끌어들이고 대신 국내의 여러 이권이 그들 손으로 들어가 국민의 생활이 날로 핍박해지는 불안한 현실을 고발했다.

1910년의 한일합방. 오래전부터 이런 슬픈 일을 당할 줄 알고 있었던 매천이었지만 막상 눈앞에 당하고 보니 그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메어져 방문을 걸어 잠그고 며칠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은 채 통곡했다. 비통한 마음으로 몇 날을 보내고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은 뒤 다섯 수의 한시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한 인물, 끝까지 자기의 굳은 애국정신을 지키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나 죽임을 당한 민영환·홍만식·조병세·최익현·이건창의 높은 뜻을 칭송하는 ‘오애시(五哀侍)’를 지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나라는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본에 치욕스런 합방조약을 하고 말았다. 매천은 까무러쳤다. 살고 싶지 않았다. 8일 저녁 술을 석잔 마신 후 가족들에게 방에 근접하지 말라고 이른 후 방문을 잠그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자 두자 쓸 때마다 붓을 쥔 손이 떨리고 한줄 두줄 써내려갈수록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4수의 마지막 시와 유서는 다음 날 끝났다. 글을 마친 매천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아편을 약사발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이제 모든 것에 마지막을 고한다. 눈을 뜨고 약사발을 입에 대고 단숨에 들이켰다.

오후 늦게 매천의 방안에 인기척이 없음을 이상히 여긴 동생 황원이 방문을 열어 봤다. 온 가족이 놀라 목숨을 건지려고 했으나 회생이 불가능했다. 식어가는 매천의 몸을 붙들고 울부짖는 가족들을 만류한 매천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죽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구나. 약사발을 세 번이나 입에 대었다 떼었다 했으니 말이다.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고 모두들 나라 잃은 슬픔을 생각하여라. 그리고 내 뜻이 적혀있는 이 시와 유서를 보아라.”

곧 혼수상태에 들더니 새벽닭이 두회째 울자 조용히 숨을 거뒀다.

이듬해 영·호남 선비들의 성금으로 ‘매천집(梅泉集)’이 출간됐다. 즉 중국으로 망명한 김택영은 황현이 남긴 애국지사들의 우국충정과 간신들의 작태를 고발하는 ‘매천집’을 간행했다.

황현은 외세의 침략과 백성들의 저항을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 일제침략과 항일의병활동을 기록한 ‘오하기문(梧下記聞)’,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동비기략(東匪紀略)’ 등 수많은 저서를 편찬했고 3천여 수의 시를 남겼다.

한말 풍운사(風雲史)를 담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총서 제1권으로 발간돼 한국 최근세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된다. 그 밖의 저서에 ‘동비기략(東匪紀略)’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그의 묘지는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에 위치한다.

/오성수 기자 star555@kj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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