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18일(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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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정도 1천년]제2부 천년의 인물-(12)전봉준
폭정·수탈에 항거…동학농민혁명 이끈 녹두장군
고부지방 동학접주 맡아 1894년 1천여명 이끌고 봉기
황토현서 관군 대파 파죽지세…한때 전주성까지 점령
반외세 투쟁 나서다 우금치 전투 대패 항일운동 불씨로

  • 입력날짜 : 2017. 07.17. 19:52
동학농민혁명기념탑 출정식 재연
동학농민혁명도 (사진 좌)부패한 봉건 조선에 대한 민중의 분노를 표출한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전국적인 봉기였지만 중심지는 전라도였다. 전라도가 중심이 된 것은 의로운 사상과 더불어 경제적인 측면도 하나의 요인이 됐다. 즉 전라도는 물산이 풍부한 곡창지대로 국가재정도 이 지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전시대에 걸쳐 수탈의 대상이 돼 농민들은 항상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시달렸다. 장흥 남외리 석대들 전경 (사진 우)동학농민군 3만여명과 관군·일본군이 일대회전을 벌여 양측 사망자가 2천명이상이나 발생한 최대 최후의 격전장이다. 장흥 석대들은 당시 강진현, 전라병마절도사영, 벽사역, 장흥도호부, 자울재를 지나는 길목에 위치한 지리적 요충지였다.
동학농민운동은 곧 전봉준(1855-1895)을 의미할 만큼 그의 역할은 컸다.

조선말기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전봉준. 그는 몸이 쇄소해 흔히 녹두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의 별명이 생겼다.

출생지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고부군(지금의 전북 정읍) 궁동면 양교리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고부군 향교 장의를 지낸 창혁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음을 당했다.

집안이 가난해 안정된 생업 없이 약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고, 방술을 배웠으며, 항상 말하기를 ‘크게 되지 않으면 멸족되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1890년 35세를 전후해 동학에 입교해 얼마 안돼 동학의 제 2세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됐다.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동학을 사회개혁의 지도 원리도 인식하고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을 지도해 나갈 수 있었다.

농민봉기의 불씨가 된 것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서 비롯됐다. 조병갑은 영의정 조두순의 서질로서 여러 주군을 돌아다니며 가렴주구를 일삼아 농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1893년 12월 농민들은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로 삼아 관아에 가서 조병갑에게 진정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쫓겨나고 말았다.

이에 동지 20여명을 규합해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거사할 것을 맹약, 드디어 이듬해인 1894년 정월, 1천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다. 이것이 고부민란이다.

지난해 4월25일 전북 고창군 무장·공음면 일대에서 동학혁명 제122주년 기념제가 열린 가운데 행사 참가자들이 당시 동학농민군 출정식을 재연하고 있다.
농민군이 고부관아를 습격하자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갔다.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무기고를 파괴해 무장하고 불법으로 빼앗겼던 세곡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돌려줬다.

이때 자연발생적으로 고부민란에 참여했던 농민들은 대개 집으로 돌아가고 전봉준 주력부대는 백산으로 이동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사태의 모든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돌려 체포와 분탕, 살해를 일삼자 다시 동학농민군은 봉기하기 시작했다. 전봉준은 여기서 동도대장에 추대됐다.

이로써 민란은 동학농민전쟁으로 전화했다. 1894년 4월 그가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를 향해 진격하던 중 황토현에서 관군을 대파했다. 이어 정읍·흥덕·고창을 석권하고 파죽지세로 무장에 진입, 이곳을 완전히 장악했다.

여기에서 전봉준은 창의문을 발표해 동학농민이 봉기하게 된 뜻을 재천명했고 영광·함평·무안 일대를 진격하고 전주성을 점령했다.

이에 앞서 양호초토사 홍계훈은 정부에 외변차입을 요청했다. 결국 정부의 원병 요청으로 청국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일본군도 텐진조약을 빙자해 조선에 진출해왔다.

국가운명이 위태로워지자 홍계훈의 선무에 일단 응하기로 하고, 폐정개혁안을 내려놨는데 이를 홍계훈이 받아들임으로써 양자 사이에는 5월7일 이른바 전주화약이 성립됐다.

그리고 전라도 각 지방에는 집강소를 둬 폐정의 개혁을 위한 행정관청의 구실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청·일전쟁이 일어나 사태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마침내 9월 중순을 전후해 동학농민군과 최시형을 받들고 있던 손병희 휘하의 10만여명의 북접농민군이 합세해 논산에 집결했다. 자신의 주력부대 1만여명을 이끌고 공주를 공격했으나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11월 초 우금치 싸움에서 대패했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석대들 옆 산허리에 희생된 농민군 영령을 추모하는 동학농민혁명기념탑.
그뒤 전라도 순천 및 황해 강원도에서 일부 동학농민군이 봉기했으나 모두 진압되자 후퇴해 금구·원평을 거쳐 정읍에 피신했다. 순창에서 지난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2일 체포돼 일본군에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고,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오성수 기자 star555@kj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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