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21일(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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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동서교역의 관문 ‘스리랑카’
‘석가모니 선조들의 고향은 한반도’…놀라운 역사 이야기

  • 입력날짜 : 2017. 08.08. 19:02
석가모니가 다녀간 곳으로 알려진 강가라마야 사원. 어느 여자중학교 학생들이 사찰에 와서 기도하고 공부도 한다.
스리랑카 역사에는 놀랄만한 사실이 숨어 있다. ‘놀라운 부처님의 가계(족보)’를 이야기 한다. 그들은 학교에서 ‘부처님의 1만년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우리 한글과 아주 비슷한 ‘팔리’ 문자로 쓰인 두꺼운 역사서다. 거기에는 ‘석가모니 선조들의 고향(시원)이 동방의 나라 한반도’라고 쓰여 있고, 그들은 이를 믿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들 싱할리족이 한민족의 후예라는 것이다. 한편으론 우리와 비슷한 외모와 문화가 이를 증명한다고 여러 학자들이 역시 함께 거들고 있다. 초기 불상이 동양형 외모, 곱슬머리 아닌 직모, 상투가 그것을 증명한다고도 한다. 싱할리족이 과연 우리 피를 받은 한민족의 일파일까! 이게 사실이라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
▶1만년 부처님의 가계

스라랑카를 지배하고 있는 ‘싱할리족’은 놀라운 역사를 말하고 있다. 자신들이 석가모니의 혈통을 이어받은 종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석가모니 선조에 대한 역사(족보)를 아직껏 유품(치아, 머리카락 등)과 함께 보관해 오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석가모니 선조들에 관한 기록인 ‘1만년의 역사’ 책자다. 사찰에 보관돼 있고, 워낙 귀중한 책이어서 일반인은 쉽게 접근하거나 볼 수가 없다고 한다. 사실 확인조차도 곤란해 뭐라 말할 수 없다. 다만 이들은 학교에서 정식으로 ‘부처님의 1만년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팔리’ 문자로 쓰인 두꺼운 역사서다. 팔리어 문자는 우리 한글과 아주 비슷하다. 일설에 의하면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 팔리어를 본따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환단고기’의 ‘구주신가’의 가림토문 비석이나 ‘이세신궁’의 가림토문 청동거울은 스리랑카 패엽경사 발위글(팔리문자)과 흡사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사원 한쪽에서 기도하고 있는 가족.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석가모니의 선조들 고향(시원지)이 동방의 나라 ‘한반도’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때문에 석가모니가 한국인의 혈통을 이어받았고, 싱할리족인 자신들도 한국인과 같은 혈통이라고 여긴다는 점이다. 즉, 부처는 한민족 출신의 뛰어난 ‘현자’이며, 그가 한국인의 후예라는 사실을 당연시하고 있다.

그 역사서에 의하면, 조선(고조선)은 물론이오, ‘주신’(主神)까지 상세히 기록돼 있고, 만주벌판은 물론이거니와 한민족의 영역이 완벽하게 기술돼 있다는 놀라운 점이다.


▶우리와 비슷한 외모와 문화

스리랑카 인들은 부처가 ‘인도인’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잘못된 사실이며, 그들은 부처가 한국인의 외모와 일치하는 ‘동양형 얼굴’과 머리 또한 곱슬머리가 아닌 완전한 ‘직모’였다고 말한다. 머리카락은 지금까지 보존돼 있어 증명이 간단하다. 뿐만 아니라 초기 불상을 보면, 부처님이 ‘상투’ 머리를 하고 있어 놀라게 한다. 인도인들이 부처의 탄생지를 현재의 그들 지명을 사용하면서 부처를 인도혈통의 ‘철학자’라고 주장하는 사실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고 있다.

평상복에 맨발로 기도하고 있는 아가씨.
한민족의 먼 선조의 일파가 만주와 티베트를 거쳐 3천년 전에 드디어 히말라야 산지에 들어와 터를 닦고 중생의 구원을 염원하면서 살던 중 석가모니란 현자(賢者)가 태어나 불교를 일으키고 열반에 들자, 힌두교 박해를 피해 기원전 300년 전에 부처님의 가계 일원(싱할리족)이 남쪽의 아름다운 나라 ‘스리랑카’로 내려와 ‘부다의 나라’를 일궜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말(언어)도 비슷하다. 언어학자 분석에 의하면 ‘언어의 유사성이 500단어에 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대표적인 것이 엄마(엄마), 아버지(아보치이), 할머니(하아머니), 할아버지(하아보치이), 보름달(보라한드) 등이다.

풍속도 비슷하다. 보름달 행사, 도깨비 문화 등이 그렇다. ‘보름달’이 뜨면 삼신께 기도드리며 빈다. 좋은 기운을 받기 위해서란다. 또한 어린 아이들이 울 때 도깨비 온다고 겁주며 달래는 것도 우리와 같다. 우리의 부처님 오신 날과 같은 시기에 붓다 행사를 하는 풍습도 같다.


▶불심이 매우 깊은 나라

스리랑카는 인도와 근거리에 있지만, 여행자들이 받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인도는 도난, 강도로 항상 조심하고 긴장을 풀지 못하지만, 스리랑카에서는 밤에 혼자 거리를 다녀도 불안한 느낌이 없다.

스리랑카 초기 불교를 담고 있는 담불라 석굴사원. 동굴 위쪽에 한글 글자가 뚜렷이 보인다.
사람들도 무척 친절하다. 아침이면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 나누기에 바쁘다. 이방인에게도 손을 흔들며 환한 미소의 아침 인사를 건넨다. 이런 차이점들은 종교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사람들이 이야기 한다.

스리랑카는 남방불교 종주국이다. 또한 불교전통이 가장 잘 살아 있는 나라다. 계율을 중히 여기고, 스님에 대한 공경심도 각별하다. 불자들이 절을 찾아 공양을 올리는 데 몇 달 전에 신청을 해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공양 시간이 되면 들어오는 스님들 발을 맨손으로 정성껏 닦아 드리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스리랑카 사찰은 완전히 독립돼 있다.

승정은 명예직이며 상징적이다. 모든 회계는 필요할 때 신도회에서 인출하고 모자라면 모금해 충당한다.

스리랑카는 보름이 공휴일이다. 금욕, 참회의 날이다. 흰옷을 입고 준비한 꽃과 향을 들고 절을 찾는다. 평일에도 모든 집안 경조사에는 사원을 찾는다. 이처럼 불교가 그들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어린이들은 부교학교에 다니기를 원한다. 불교교리를 배우는 것은 물론이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법, 이웃과 더불어 사는 법, 사회생활 문제를 극복하는 법 등을 함께 배운다.


▶스리랑카의 역사적 과정

스리랑카는 원주민은 ‘원시 오스트랄로이드 종족’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들은 ‘아시아 남부 지역’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남인도에 거주하고 있던 드라비다족 일파인 ‘타밀족’이 기원전부터 건너오기 시작했다. 기원 전후에는 비자야 왕자의 무리가 중북부에 ‘아누라드하푸라 왕국’까지 세우는 등 이주자가 늘어난다.

또 한편으로는 BC 5세기 무렵부터 북인도에서 ‘아리안족’의 일파인 ‘싱할라족’이 배를 타고 내려와 지배층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BC 3세기경 ‘아소카왕 아들’이 불교를 들여옴으로써 더욱 강화된 지배권을 확보하게 된다.

이들은 ‘아누라다푸라’ 도시를 만들고, 아누라다푸라 왕국(BC 200경-AD 1000경)을 건설한다. 당시 인도에서 이곳으로 옮겨 심은 2천300살의 보리수가 아직도 살아있어 관광객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한때 남인도의 촐라족의 지배(993-1070년)를 받은 후, 남인도 타밀족과 치열한 영토분쟁을 벌였다. 급기야는 14세기에 스리랑카 북동부에 ‘타밀왕국’이 세워지는 지경까지 갖고, 이는 지금까지 남서부의 싱할리족과 북동부의 타밀족의 갈등이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1505년 포르투갈 함대가 상륙해 점령한 이후, 1796년부터는 네덜란드, 1802년부터는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2차 대전 후인 1948년에 독립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가산업은 식민경제와 축을 같이 했다.

1830년부터 커피 산업의 눈부신 성장을 중심으로 경제가 발전하다가, 1880년부터는 차 재배가 성공한 후 곧 차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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