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5일(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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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동서교역의 관문 ‘스리랑카’ (3)
춤과 음악으로 다시 만난 고구려의 흔적들

  • 입력날짜 : 2017. 09.05. 19:11
옛 식민시대의 유럽식 건물로 가득 차 있는 갈레의 구 시가지 모습.
스리랑카는 역사상 ‘해상실크로드의 배꼽’이었고, 그 중심에 ‘갈레’ 항구가 있었다. 갈레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무역의 거점이었다. 고대 이집트는 물론이고 페르시아, 아라비아, 로마, 그리고 대항해시대의 서구 열강들이 이곳에 무역의 거점을 뒀다.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여러 국가들의 서구 진출 시에도 길목으로 활용했다. 그야말로 해상실크로드의 배꼽이었던 것이다. 우리 역사 속에도 삼국시대부터 교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곳에는 지금까지도 이 포구에는 수많은 해상실크로드의 흔적과 향기가 남아 있어 연중 관광객이 모여들고 있다.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
▶동서 문화 흡수…융복합 해양문명

‘갈레’는 예로부터 무역이 활발했던 도시다. 동서교역의 중요한 중계지인 ‘해상실크로드의 거점’이었다. 홍해나 걸프만 상인들이 동으로 오거나, 동남아와 중국 상인들이 서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흔히들 ‘갈레’를 ‘해상실크로드의 배꼽’이라고들 한다. 유럽과 아랍, 중국을 오가는 항로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 때문이다. 갈레가 ‘항로의 허브’ 또는 명실상부한 ‘세계의 배꼽’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스리랑카 최초의 고대도시 ‘아누라다푸라’에서 발견된 ‘만다라 지도’가 주목을 끌고 있다. 7-8세기경 그려진 지도로 판독된 것이다. 커다란 둥근 돌판에 지도가 각인돼 있다. 스리랑카를 세계의 중심으로 설정한 고지도다. 일찍이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한 해양관을 엿볼 수 있다. 이 곳의 전통 선박 아웃리거(outrigger)와 삼각돛배 다우(dhow)도 그들의 융합해양기술을 엿보게 한다는 주장도 있다. 즉 현외(舷外) 장치가 달린 ‘아웃리거’는 주로 동남아 지역에서 보이는 선박기술이고, 다우는 콜롬보항 서쪽에서 보여 지는 선박기술이어서 스리랑카가 동서를 모두 흡수한 융복합 해양문명의 중간지대였다는 것이다.

갈레가 해상실크로드 배꼽 역할을 한 데는 자연조건이 한목을 했다. 바로 무역풍(계절풍)이다. 스리랑카는 북동몬순(겨울철 항해)과 남서몬순(여름철 항해)에 따라 동서 항구를 자연스럽게 번갈아 갈 수 있는 천혜의 거점이었다. 몬순(Monsoon)은 계절에 따라 각기 반대 방향으로 선박을 운행할 수 있는 바람이다. 이 바람은 무역을 하는 뱃사람들에게 더 없이 좋은 바람이었다. 이를 후세 사람들은 무역풍이라 부르게 됐다.

대항해시대 등대 앞에 선 필자. 서구 열강들은 암석으로 된 얕은 바다에 화강암으로 견고하게 요새를 구축하고 식민지를 경영했다.
▶기원전부터 유럽 해상교류 중심지

갈레의 역사는 이집트문명과 연관될 정도로 오랜 역사다. 옛날 클레오파트라에게 보낼 선물도 이곳에서 배에 선적해서 이집트 홍해로 출발시켰다고 전해오는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스리랑카에서는 그리스·로마·페르시아·중국 등의 다양한 고대국가들 동전이 출토되고 있다. 인도 북서부 펀잡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알렉산더 제국의 동전도 출토되고 있다. 그들이 당시 스리랑카를 드나들었음을 중명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남인도와 이곳에서 향료를 구하고 있었다.

스리랑카에는 수령 700여년의 아프리카산 ‘바오밥나무’도 볼 수 있다. 아랍 상인이 심었다는 전설의 나무다. 일찍이 무슬림이 정착했다는 증거다. 오늘날 스리랑카의 상당수 장사꾼이 아랍인 후예다.

유럽 지도에 스리랑카만큼 일찍 등장한 아시아의 섬도 없다고 한다. 스리랑카의 지리적 중요성은 이미 프톨레마이오스(83-168년께) 지도에 등장한다. 거기에는 스리랑카를 아주 과대하게 그려놓고 있다. 그 만큼 중요한 곳이었다는 증거다. 인도의 3분의1, 인도양의 25분의1 크기다. 항구, 산과 강, 수도인 아누라다푸라, 심지어 코끼리 서식지까지 나온다.

멀리 떨어진 아일랜드와 영국 지도에도 1세기경부터 등장하고 있다. 적어도 2천여년 전부터 전 유럽인이 스리랑카에 이르는 노정을 파악했다는 증거다.

이중삼중으로 견고하게 축조된 갈레 성곽.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원형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신밧드(Sindbad) 모험’에 나오는 보물섬(세렌디브섬·Serendib)이 바로 이곳으로 여기고 있다. 신밧드가 7번의 항해에서 겪은 모험담을 엮어낸 이야기다.

▶10세기 이후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

스리랑카는 이미 10세기경 아라비아인 상관(商館)이 설치됐다. 1588년 포르투갈에 점령됐고, 1640년 다시 네덜란드가 차지했으며, 1796년 다시 영국으로 넘어갔다. 네덜란드는 돌로 보루를 바꾸고, 마을 전체를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쌓았다. 해상실크로드 포구 증 최대로 견고하고 또한 가장 큰 요새를 구축했던 것이다.

시가지는 정확한 구획을 기본으로 도시계획에 따라 만들어졌다. 당시의 건물, 도로, 성벽이 현재까지도 완전하게 유지 사용되고 있는 이유다. 당시 네덜란드 군인의 숙소는 현재 우체국으로 쓰이고 있다. 1796년 새롭게 점령한 영국은 용수로를 만들고, 1883년 빅토리아여왕에게 바치는 기념탑을 건설했다. 네덜란드 법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대항해시대의 개막으로 16세기부터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에 식민정복 됐다. 이 시기 포르투갈어 ‘Ceilao’에서 비롯한 실론(Ceylon)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뿐만 아니라, 갈레는 중국에 오래 전에 알려진 도시다. 고대 중국 문헌에도 ‘고랑보’(高郞步)로 자주 나온다. 중국 고승인 법현(法顯)은 이곳을 그의 저서 ‘불국기’(佛國記)에 기록하고 있다. AD 399년 중국을 떠난 그는 402년 인도에 도착한다. 인도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귀국길에 스리랑카에 2년여 머문다. 당시 수도 ‘아누라다푸라’에는 가로망이 정연하고 5-6만명의 승려가 활동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엄청난 불교의 융성지 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또한 그는 ‘바리하리 축제’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10년 주기로 연 ‘불교축제’다. 7월 보름에 코끼리를 화려하게 장식시켜 부처님의 치아를 태우고 행진하는 커다란 축제이자 국가행사다.

원나라 시대에 정화 함대는 참파(베트남) 시암(태국) 팔렘방(인도네시아), 말라카(말레이시아), 실론(스리랑카)를 거쳐 1407년 캘리컷(남인도)에 도달한다. 정화는 이 곳 갈레에서 막대한 보물을 얻어내기도 했다.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와 교류 활발

2천600년 전의 고대도시 ‘아누라다푸라’가 있는 스리랑카! 수백 년 동안 밀림 속에 파묻혀 있던 이 고대 도시는 1912년 발굴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천600년 전, 뛰어난 의학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세계 최초로 종합병원을 세워서 ‘약탕’과 ‘수세식 변기’를 사용했던 나라였다. 바위 위에 세워진 철옹성, 시기리야! 치밀하게 설계된 계획도시, 폴론나루와! 등이 이를 증명한다. 고대문명이 꽃 피었던 섬 나라였다.

스리랑카는 오랜 옛날부터 우리와 교류해왔다.

삼국유사에 완하국 혹은 용성국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를 미뤄봐 적어도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와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동고승전에도 두 지역 간에 교류에 관한 많은 자료가 있는데, 능가도 혹은 석란도, 동상도로 잘 알려져 있었다.

스리랑카에서 고구려를 만날 수 있다. 곳곳에 만나는 고구려의 춤과 음악! 고구려 악기와 꼭 닮은 악기가 ‘굿거리장단’을 두드리고, 고구려 춤사위가 이들 춤에 그대로 남아있다. 중국은 물론 멀리 서역까지 외국과의 문물교류가 활발했던 고구려! 그 흔적이 멀리 스리랑카에까지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주목한 것은 악기와 춤이다. 집안현 4호묘 벽화에 묘사된 고구려 악기 ‘요고’는 이곳의 ‘다마로’와 비슷하다. 모양뿐만 아니라 그 음색과 박자조차 매우 유사하다. 또한 거문고의 모델은 중국 악기가 아닌 이 곳의 ‘비나’이다. 거문고는 고구려의 왕산악이 중국의 현악기를 개량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중국엔 거문고와 비슷한 악기가 없다고 한다. 이곳의 ‘비나’가 거문고의 원조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춤사위도 비슷하다. 황해도 안악 3호분 벽화 ‘무악도’에 그려진 독특한 춤사위가 신기하게도 현재 이곳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곳 전통 ‘바라따나띠얌’의 발을 꼰 춤사위가 그것이다. 이 춤은 수천 년을 이어 온 전통춤이다. 단순히 즐기는 춤이 아니라 신을 만나고 경배하고 신과 하나 돼 행복을 찾아가는 구도의 과정이다. 동작 중에 무릎을 구부리고 다리를 ‘X자’ 모양으로 교차시킨 춤사위는 황해도 안악3호분 무악도에 그려진 춤사위와 똑 같다.

뿐만 아니라 언어도 유사하다. 타밀족이 사는 스리랑카 서북부에 가면, 언어에 깜짝 놀란다. ‘엄마, 아빠’를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그렇다. 우리말과 거의 같은 단어가 무려 1천300여개에 달한다.

조선시대 이수광의 ‘지봉유설’(1614년)이다. 스리랑카를 석란산(錫蘭山)으로 표기하고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석란산은 큰 바다 속에 있다. 임금은 불교를 숭상해 코끼리와 소를 소중히 여긴다…. 나라는 부유하고 땅은 넓으며 인구가 조밀하기로는 조와(자바)에 버금간다. 구슬을 캐는 늪이 있어서 여러 나라 상인들이 앞다퉈 와서 사간다”고 했다. 비교적 정확한 정황을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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