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2일(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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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준 박사의 책으로 세상읽기] 인생의 저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아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저 민음사 1만3천원

  • 입력날짜 : 2017. 11.12. 18:30
어느새 낙엽이 속절없이 뒹구는 겨울의 초입이다. 인생의 희로애락처럼 계절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자신의 모습을 달리 한다. 봄은 대지에 씨앗을, 여름은 뜨거운 생명력을, 가을은 풍성한 열매를, 겨울은 삭막한 황량함을 보여준다. 한편 쉼 없이 움직이는 계절의 변화는 문득 지난 삶을 뒤돌아 보게 한다. 철부지 시절에는 봄과 여름이 늘 곁에 있었지만 아쉽게도 청춘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고. 철이 들고 세월이 갈수록 가을의 쓸쓸함과 겨울의 냉랭함에 자꾸 지난 과거를 찾게 된다. 삶이란 잦은 시행착오와 아픔을 견디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애써 위로하지만 지나온 그림자는 늘 아쉽고 그립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즈오 이시구로’는 일본 태생의 영국 작가다. 그의 대표작품 중 하나가 ‘남아 있는 나날’이다. 이 작품으로 맨부커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1994년에는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제작되어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사랑과 참다운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했다.

원제목인 ‘The Remains of the Day’는 여러 의미가 함축돼 있다. 시대적으로 1930년대 유럽과 영국의 격동기를 암시한다. 일부 문학가들은 ‘인생의 황혼기’, ‘그의 남은 인생’, ‘주인공의 남은 인생과 그들이 사는 더 큰 사회로부터 남은 것’이라는 뜻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작가는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남아 있음을 얘기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잊어버린 사랑이 있다.

소설은 집사로서 정직하고 충실한 스티븐스의 인생을 잔잔히 담고 있다. 우리나라 정서상 집사라는 신분에 대해 명확히 정립되거나 전문적인 직업으로 인식하지 않지만 영국의 집사는 직업으로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위대한 집사로서 맹목적이고 충직함으로 달링턴 가문을 위해 헌신한다. 하지만 믿고 따랐던 달링턴 경이 친나치주의자였다는 사실에 그동안의 존경심과 신뢰가 무너진다. 달링턴 경이 죽고 나자 달링턴 홀은 미국인 갑부 패러데이의 손에 넘어간다. 주인이 바뀌었지만 스티븐스는 집사의 지위를 유지하고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 어느 날 패러데이의 권유와 예전에 같이 일했던 켄턴 양이 보낸 편지를 음미하면서 6일간의 여행길에 오른다. 그는 집사로서 직업의식이 투철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같이 일했던 켄턴 양의 사랑을 알면서 애써 모른 척 한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 떠나가는 것조차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던 아쉬운 날들을 회상한다.

여섯째 날 저녁, 스티븐스는 웨이머스 바닷가 마을에서 20여년 만에 만났던 켄턴 양과의 무심했던 재회를 생각한다. 그때 60대 후반쯤 돼 보이는 노인이 다가와 스티븐스에게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의미 있는 말을 한다.

젊은 시절의 신념은 삶의 에너지가 된다. 하지만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되돌려 보면 부끄럽고 아쉽기도 한다. 주인공 스티븐스는 달링턴 가문을 위해서 35년을 헌신하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최고의 집사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침내 인생의 황혼 녘에서 깨달은 젊은 날의 아쉬운 사랑이 그를 더욱 서글프게 만든다.

필자는 ‘남아 있는 나날’을 읽으면서 비록 봄과 여름이 지나갔지만 가을의 끝자락과 겨울이 남아 있음을 감사히 여긴다. 지나가는 계절이 나에게 준 가르침은 변화 속에 숨어있는 여백의 가치다. 우리는 바쁜 일상을 핑계로 조금씩 변모하고 있는 계절을 알지 못한다. 단순히 꽃이 피거나 낙엽이 떨어져야 비로소 새로운 계절이 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후회한다. 지난 봄과 여름에는 뭘 하고 보냈는지, 변화는 한순간에 이뤄지지 않는다. 살며시 다가와 천천히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저 하루하루를 진실 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 과거에 집착하고, 다가올 미래만을 고대하면 소중한 사람과 지금의 삶을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남아 있는 나날’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무지의 의한 신념은 눈과 귀를 멀게 한다. 그 누구도 나의 삶을 대신 살아 주지 않는다. 인생의 겨울에서 지나간 봄을 애타게 그리워하기보다는 오늘 당장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만 하고 살기에도 짧은 인생을 살기 때문이다. /도시·지역개발학 박사


도시·지역개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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