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18일(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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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해상실크로드의 중국 거점, 영파 (4)
영파 월호공원 ‘고려사관’ 복원…한·중 교류 재조명 활발

  • 입력날짜 : 2017. 12.12. 18:34
영파 시가지 중심을 흐르는 운하.
중국 절강성은 양자강 하구에 있다. 절강에 풍년이 들면 천하가 그해에는 굶지 않는다고 하는 곡창지대다. 이곳 동쪽 해안에 영파(닝보)항이 있다. 당나라 때는 ‘명주’(明州)라 불렸던 곳이다.

영파는 고대 한반도와 교류가 가장 많은 중국 항구 중 하나다. 당나라로 향한 거점 항이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한반도에 가장 큰 영향을 줬던 항구이기도 하다. 특히 언어와 풍속에 있어서 우리나라에 많은 영향을 줬다. 지금도 영파 방언은 우리말과 가장 비슷하다. 어순도 한국어와 같은 주어+목적어+술어 순으로 이뤄져 있고, 단어도 많이 같다.

영파 자체가 한국인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관광지는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이와 같이 우리나라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그 때 당시의 우리 선조들의 유적을 찾아보는 재미가 솔솔 해서 필자는 자주 간다. 더욱이 무안↔상해 직항노선이 개설돼 이곳 광주에서 서울 가는 것보다 더 가까워 부담이 없다. 머리가 아프면 바로 떠날 수 있다.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
▶중국 땅에 들어가는 관문 ‘영파’

영파는 당나라로 불교를 공부하러 갔던 구법승(求法僧)들이 거쳐 가는 고대 한·중무역의 거점이었다. 당나라 시대에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시험인 빈공과(賓貢科)가 있었다. 신라인이 당 말기까지 합격한 사람은 58명, 이후 오대(五代) 시기에 32명, 이들을 합쳐서 모두 90명의 외국인이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그 중 신라인이 80명이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우리나라와 교류의 전성기를 이뤘다. 송나라가 북방의 거란(契丹)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와 손잡은 것이 계기가 됐다. 양국은 활발한 문물교역 뿐만 아니라 외교관(사신)을 파견했다. 고려의 금·은·나전칠기·화문석 등의 특산품이 수출됐고, 송나라의 비단·서적·도자기·약재 등이 수입됐다. 1117년 ‘고려사’(高麗司)를 설립해 무역 사무를 맡게 하고, ‘고려사관’(高麗使館)을 설치해 외교사절들에게 숙박 등의 편리를 제공했다. 송은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國信使)의 예로 대했다.

▶고려시대 한·중 연결 국제항로 발달

고려는 해상세력이 건국했다. 때문에 수운이 발달했다. 연안항로는 물론이고 국제해로도 발달했다. 지방과 중앙은 해로와 수로가 연결했다. 고려의 ‘예성항’은 중국 산동의 등주항, 절강의 명주항, 광동의 천주항과 연결됐다. 예성항은 개경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항구였다. 이곳의 벽란도(碧瀾渡)에는 객관이 있었다.

영파의 옛 정원에서 일행들과 기념촬영한 필자.
고려인들은 대체적으로 ‘세 개의 항로’를 이용했다. 제1의 항로는 ‘황해중부 횡단항로’였다. 벽란도(개성)↔석도진(산동성) 노선이다. 직선거리로 200여㎞ 정도였다. 송사(宋史)에 따르면 이틀이 안 걸리는 거리였다.

제2의 항로는 제1의 항로보다 약간 남쪽으로 가는 항로였다. 삼국시대 백제가 동진과 교섭하던 항로다. 늦봄에 부는 계절풍을 이용해 쉽게 다녔다.

제3의 항로는 ‘동중국해 사단항로’였다. 벽란도(개성)↔영파(절강성) 노선이다. 북송의 사신인 서긍(徐兢)이 이 항로를 이용해 개성이 왔다. 영파를 출발해 진해구(鎭海口)에서 바다로 나간 다음, 주산군도의 바깥쪽에 있는 보타도인 매잠(梅岑)에서 신풍(信風)을 기다렸다. 그 곳에는 신라초가 있었다. 봄 계절풍(5월의 서풍)을 타고 흑산도를 거쳐 우리나라에 이르는 뱃길이다. 한반도에 이르는데 보통 일 주일 정도가 걸렸다. 개경까지는 20일이 채 못 걸린 항해였다. 흑산도는 중간 기착지로 사신이 묵는 관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에서 절강으로 가기에는 어려운 항로다. 보통 겨울에 북동풍을 타고 갔으나 힘들었다.

당나라의 무역선.
항해는 늘 쉬운 것이 아니었다. 바람을 잘못 만나면 숱한 희생도 뒤따랐다. ‘고려사’에는 1076년에서 1174년까지 약 100년 동안에 송나라에 표류했다가 돌아온 고려인들의 이야기가 12차례나 기록돼 있다. 그들은 약 140여 명인데, 특이한 일은 송나라 정부에게서 좋은 대우를 받고 돌아온 점이다. 이들 가운데 영파(명주)에서 송환된 것이 7회에 90여명이나 된다.

제4의 항로는 ‘유구(琉球)항로’다. 이 항로는 제주도와 현재 오키나와 사이를 오고가는 항로였다. 제주도 출신 장한철(張漢喆)은 육지로 가다가 표류해 오키나와로 갔다. 그는 광동 지방의 남쪽에 청려국 향사도(靑黎國 香瀉島)에 조선인이 사는 마을이 있다고 했다. 향사도가 어딘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사람들의 이동이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표류 사실들을 보면 제주도와 오키나와는 아주 오래 전부터 교섭했을 개연성을 보여준다. 광해군 때 유구국의 왕세자가 포로로 잡혀간 왕을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다가 폭풍으로 인해 제주도에 표했는데, 제주목사가 이들을 죽이고 보물을 빼앗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영파에 남아있는 유적과 흔적

영파의 역사는 길다. BC 2천년 하(夏)왕조 시대부터 존속했다. 당나라 때는 ‘명주’(明州), 송나라 때는 ‘경원부 절동로’(浙東路), 청나라 때는 영파로 불렀다. 명나라 때 해금정책(해상봉쇄) 시기에도 이 곳만은 유일하게 개방했다.

즉석에서 얼굴 조형물을 만들어 주는 길거리 장인.
최근 영파에는 우리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신라초’(新羅礁), ‘신라방’(新羅坊) 등 신라의 유적만 해도 많다. 최근 월호공원에 ‘고려사관’을 복원해 옛 우리나라와의 교류역사를 조명하고 있다. 고려사관은 송나라 시대에 고려 사신들이 머무는 여관이었다. 이 곳에 최부(崔溥·1454-1504)의 기념관도 함께 조성돼 있다. 그는 조선 성종 때 이곳에 표류해 유명한 표류기를 남겼던 선비다.

이들 유적으로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8월 대보름에는 고려인들끼리 모여 잔치를 했을 것이다. 3일 밤낮을 먹고 마시고 춤추며 노래하며 즐겼을 것이다. 이들 유적을 보는 순간, 먼 타향에서 추석명절을 보내는 한반도인들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영파의 옛 시가지 ‘자성고진’

자성고진(慈城古陣)은 영파의 옛 성터이다. 가장 오래된 거주지다. 관청이 있던 곳이라 꽤 컸다. 오래된 낡은 건물과 고목들, 녹슨 대문, 좁은 도로, 지나치게 커버린 가로수 아래 다닥다닥 붙어진 나즈막한 오래된 집들이 긴 역사를 반영했다. 고을을 다스렸던 관아, 서당이었던 명륜당, 풍년과 제사를 지냈던 토지사(土地祠), 감옥과 옛 공공건물들이 세월의 냄새가 가득 배어 있다.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도교사원이나 공자사당이 오랜 역사를 품고 자태를 뽐내고 있다. 중국 민란의 관람실도 있다. 진승과 오광의 민란부터 황소의 난 등이 다 소개돼 있었다. 관음을 모신 절에는 불공을 드리러 오는 사람들로 붐볐다.

이곳 정씨17방촌은 명청시대 시가지로 지금껏 남아 있다. 유명한 상인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일명 영파방(닝보방)의 본향이다. 이들은 지금도 상해와 홍콩 대만의 경제를 좌우한다. 이곳은 지금도 해신제를 지내고 민속공연을 할 만큼 전통이 살아 있다.

현재 중국의 대표적 역사공간이다. 완전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아직도 사람들이 그대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변하지 않는 삶 속에 훈훈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골목을 걷는 내 마음이 편안하다.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고 옛 현지인을 만날 수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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