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7일(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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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숙 정신’이 있었다
나의갑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

  • 입력날짜 : 2018. 06.11. 00:24
가슴이 파랗게 일렁였다. 청보리밭을 스쳐가는 작은 바람처럼 싱그럽게 느껴졌다. 그걸 눈에 넣으면 언제나, 콩콩콩 뛰는 가슴 어이할 수 없었다. 월간 순수 문예지 ‘현대문학’. 대학에 막 들어가서였다. 헌책방을 있는 대로 뒤져 그걸 긁어모았다. 창간호(1955년 1월)부터 달달 외다시피 했다. 나잇살깨나 철떡거린 여직까지 내 습작의 크기는 요만큼도 자라지 않고 있고, 궁상스럽게도 설렘만 두근두근 의구할 따름이다.

지난 5월23일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현사련) 개소 30주년 기념 시민집담회가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있었다.

그날, 내 머릿속에서 ‘현대문학’과 함께 도깨비가 튀어나왔다. 콩닥콩닥, 예나 지금이나 가슴에 이는 리듬은 여전했다. 송기숙의 ‘도깨비 잔치’가 내 묵은밭에 나타나 꽃물을 들인 거다. 1978년 ‘현대문학’ 6월호에 실린 이 단편소설은 “일제강점기에 경찰 간부를 지내면서 독립투사를 고문하고 죽이는 데 앞장섰던 카네야마 경부의 아들이 해방 후에도 중학교 교장 등 교육계의 지도적 인물로 활약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한 것”(임규찬 문학평론가·성공회대 교수)으로, 참으로 팔자가 요란했다. 그 경부의 아들이 사람을 시켜 서점에 깔린 ‘현대문학’ 6월호를 거지반 쓸어 담아가 버린 거다.

1986년 ‘월간조선’ 7월호는 송기숙을 쓰면서 ‘호랑이 등에 올라탄 사람’이란 이름표를 달아준다. 이듬해 7월호에도 ‘시대가 투사를 만든다’는 제목으로 송기숙의 지난한 고행길을 압축한다. 전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였던 송기숙은 1978년 6월27일, 날선 유신독재(박정희)에 ‘폭탄’을 던진다. 전남대 교수 10명과 야무지게 어깨동무를 하고 박정희가 1968년 개발해낸 ‘국민교육헌장’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우리의 교육지표’를 선언한 것인데, 이게 그가 올라탄 호랑이 등 1호다. 말 잘 듣는 민(民)을 조제하기 위해, 그러니까 치자의 편리한 통치를 위해 헌장에 집단주의적 가치를 찔러 넣었다는 것이 교육지표사건 아닌가. 5·16군사쿠데타의 ‘혁명공약’처럼 잘 못 외우면 벌이 내리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송기숙은 감옥에 갇혔고, 교수직에서 해직되었다.

‘오월의 사회과학’을 쓴 최정운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부르짖듯, “이 땅의 역사에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이 땅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게 만든 사건이며, 이 땅의 모두에게 각자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만드는 사건”이 교육지표사건 이태 뒤 일어난다. 5·18이란 것이다. 시민수습위원회에 참여한 송기숙은 학생수습위원회도 만들어냈다. ‘수습을 빙자한 폭동 지휘자’로 지목되었고, ‘내란중요임무종사 위반’이란 죄를 둘러썼다. 두 번째 올라탄 ‘5·18 호랑이’는 아주 고약했다. 고문도 감옥살이도 혹독했다. 1984년 8월 해직 7년 만에 전남대 조교수로 복직된다.

이후에도 그는 남이 잘 가지 않는 길을 간다.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창립(초대 공동의장), ‘학원안정법’ 제정 반대 투쟁, ‘민족문학작가회의’ 주도, ‘균형사회를 여는 모임’ 공동대표 등의 전력이 그걸 일러준다.

아까 말한 ‘오월의 사회과학’에서 최 교수는 ‘무지막지한 감탄’을 머리말에 담는다. “당장 자료부터 준비하기 위해 다음날 손 교수(서강대) 연구실에 들렀다. 가장 중요한 자료라며 처음 내게 준 책이 바로 그 무지막지한….” 최 교수가 깜작 놀란 책은 송기숙이 만들었다. 그가 총책임자란 말이다.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사료전집)이 그거다.

1988년 5월23일 광주에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란 간판을 걸었다. 소장은 송기숙이, 이사장은 리영희 한양대 교수가 맡았다. 현사련은 전국 대학교수 20여 명이 참여한 5·18 관련 첫 학술연구단체라는 평가를 받는다. 송기숙이 “그들(민중)이 어떻게 싸워왔고 그 정신은 무엇이었던가, 그 일차적 사실의 정리마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5·18 참여자들의 증언을 방대하게 수집하기로 했다”고 설립 취지를 밝힌 것처럼, 구술증언채록이 1차 작업이었다. 5·18을 감시하는 눈이 시퍼럴 때였으므로, 호랑이 등에 세 번째 올라탄 셈이었다.

사무실도 있어야 하고, 조사원도 30명 정도 확보해야 하고 넘어야 할 산이 높고 험했다. 조사원들이 500명을 하나하나 만나 체험담과 목격담을 채록했다. 2년의 작업 끝에 1990년 5월 그 ‘무지막지한’ 사료전집이 나왔다. 눈이 좋은 사람도 돋보기가 아니면 읽을 수 없을 만큼 작은 글씨였다. 자그마치 1652쪽.

그렇다면 그 많은 돈은 다 어디서 나왔을까? 김길 전 광주시의회의장은 사무실을, 고 박정구 금호그룹회장은 3천만원을, 강연균 화백은 자신의 작품을 내놓았는데, 모두가 가만히 도와줬다고 딸 송강희 씨는 현사련 30주년 시민집담회 때 전했다. 10년 뒤, 아버지 송기숙은 딸한테 슬며시 ‘사료전집을 만들 때 3억원이 들었다. 나는 빚쟁이야’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사료전집이 5·18 연구자나 기자 등에게 텍스트로 인정된 건 오래전 일이다. 전에도 그랬지만, 9월19일 출범 예정인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위원 및 조사관 등에게도 소중하게 쓰일 것이다. ‘5·18 중언용 바이블’이란 애칭이 아깝지 않다. 이 책은 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때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61권)와 함께 ‘두 기둥’ 몫을 했다 한다.

송기숙은 약자는 품고 강자엔 맞섰다. 소설에서도 그랬고, 현실의 삶에서도 그랬다. 민중문학의 대가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그걸 ‘송기숙정신’이라 이름 한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시민집담회 날, 그의 딸이 감사패를 대신 받았다. 몸이 편치 않는 그, 멀리 있는 5·18의 진실. 광주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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