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25일(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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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공원 어떻게 가꿔야 하나](10)광주천과 충장로 연계방안
“광주의 젖줄…역사·문화·관광자원 연결고리 활용을”
항일투쟁·민주화운동 발상지·주요 상권 등 인접
충장상인회 활성화·지속가능 도시재생사업 활발
광주공원 일대 자원 연결…지자체간 협업 필요

  • 입력날짜 : 2020. 11.08. 19:20
무등산에서 시작된 물줄기에서 비롯돼 광주의 역사와 함께 흘러온 광주천 왼쪽으로 사직공원과 광주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광주천은 무등산에서 시작된 물줄기에서 비롯돼 광주의 역사와 함께 흘렀다. 무등산 남서쪽 사면인 동구 용연동 용두골 일대에서 발원해 시의 중심부를 흘러 서구 치평동 일대에서 영산강과 합류하는 하천이다. 과거 광주의 첫 출입구였고, 현재 행정동을 나누는 기준으로 각각의 역사·문화 관광자원들이 발전해 왔다.

광주공원 가장 가까이에 인접해 있는 상권은 광주천 너머의 ‘충장로’였다. 광주천을 따라 사람이 모이고, 장이 열리면서 자연스럽게 상권이 형성됐다. 이처럼 충장로 상권과 광주공원 일대 역사의 흔적·문화·관광자원을 연결하면, 다채로운 광주다운 도시재생이 이뤄질 수 있다는 중론이다. 이에 ‘광주천’은 그 주요 연결고리로 작용해야 한다.

과거 광주천은 지금의 남광주에서 양림동 쪽으로 흘러들어 곳바실(양파정) 앞에서 넓은 보를 만들었고, 다시 사직산을 향해 굽이치던 강물이 아랫 곳바실에 부딪히며 흐르던 강물이었다. 1926년 일제의 하천정비 일환으로 직강화하면서 광주천이라는 획일화된 이름으로 명명했다.

직강 전 강을 넘나들던 유일한 다리였던 서천교(현재의 부동교 인근) 일대의 강폭은 300m가 넘었고, 넓은 강폭 한편에서는 작은 장이 형성됐다. 광주읍성 북문 밖에는 ‘시리’라는 이름의 시장이 있었는데, 읍성 주변으로 도시가 확장되면서 자연스럽게 광주천을 따라 시장이 형성됐다고 알려져 있다.

상권이 형성된 것은 지난 1920년대로 지금의 ‘부동교’ 부근 백사장에는 작은 장이 들어섰고, 옛 한일극장과 현대극장 사이에 큰 장이 섰다. 호남 각지의 장꾼들이 모여들어 시장이 형성됐고, 사직공원에 있었던 광주 신사와 가까워 일제는 도심과 가깝고 좁다는 이유로 지금의 양동시장으로 장을 옮겼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을 모두 거친 이후 도시화 사업으로 충장로 5가와 구성로는 구 광주역사, 공영 터미널 등이 들어서는 등 교통의 요충지로 충장로4-5가의 호황기를 이끌었으나 1990년대에 들어서 주요도로의 확장과 시청, 터미널, 도청의 이전과 신도심 개발에 따라 충장로는 구도심으로 전락해 쇠퇴의 길을 걸었다.

최근 동구 구도심 상권은 도시재생사업과 충장로 상인들의 위기 의식 속에 옛 영광을 살리기 위한 노력으로 명성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충장로 상인회가 활성화되면서 2019년에는 30년 이상 한자리를 지킨 ‘오래된 가게’를 자체 선정해 동판 사업과 아카이브 사업을 민관협력 체계로 진행한 것. 충장로 상인회는 오래된 가게 63개를 선정해 구도심으로 쇠락이 아닌 누구나 다시 찾아 오는 상점가로 재탄생의 발판을 다지고 있다.

앞서 광주 동구는 지난해까지 충장동을 포함해 주요 구도심에서 도시재생선도지역 사업을 진행, 지속가능한 도시재생의 마중물 역할을 수행한 3개 거점시설(푸른마을공동체센터·미로센터·충장22)을 조성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권역별 지역 특색을 반영한 거점 시설을 통해 주변지역으로 파급효과를 확산한다는 골자로 거점시설 간 연계를 통해 원도심 활성화 계기로 삼았다.

충장로 상권과 광주공원에 인접한 광주천도 역사와 흐르며 다양한 변화를 거쳤다.

광주천 일대는 일제강점기까지 광주의 주요 관문 역할을 했다. 그간 흙과 나무로 이뤄진 ‘노지다리’로 물류와 자원이 오갔고, 1928년에는 광주공원과 시내를 잇는 콘크리트 구조물인 ‘광주대교’가 건설돼 오늘에 이른다.

광주공원 인근에 세워진 ‘석서정(石犀亭)’ 역시 광주천의 깊은 역사를 체감해 볼 수 있는 대표 상징물로 자리잡았다.

석서정은 고려 우왕때 광주목사 김상이 광주천의 물길을 바로잡아 주민들의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지금의 금교 근처에 석측을 쌓고 섬을 만들어 그위에 정자를 짓고 석서정이라 명명, 양쪽으로 다리를 놓아 사람들이 건너다녔다. 목은 이색이 기문을 짓고 첫 머리에 광주를 빛의 고을이라고 ‘석서정기’를 지으니 광주가 빛고을이라는 별칭을 갖게되는 어원의 시초가 됐다고 전해진다.

그때의 위치는 아니지만 2006년 광주공원 대교 옆에 정자를 세우고, 옛 선인들의 광주 사랑과 치산치수 정신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복원, 옛 ‘석서정’의 현판을 다시 걸고 시민들의 쉼터가 됐다.

또 광주천 서천교 밑 백사장은 구한말 남도 의병의 물꼬를 텄던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 의병장의 처형 장소였다. 1919년에는 학생들과 교사, 장을 보던 군중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항일운동의 발상지였다. 나아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에는 학생들의 투쟁 행진이 광주천 부동교까지 이어졌고,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엔 시민군과 신군부의 주요 격전지였다.

이처럼 광주천은 수많은 투사들과 시민들이 국가주권을 사수하기 위해 피를 흘린 곳이었다. 역사적 의미와 함께 도심 발전의 중심에 있었고, 현재는 원도심과 연계한 도시재생이 곳곳에 이뤄지고 있다.

이제 광주천 일대 관할 자치구간의 협력으로 상생발전할 수 있는 방향을 함께 모색해야 할 때다.

구용기 전 사직문화보존시민모임 대표는 “광주의 역사와 맞대어 흘렀던 광주천에는 역사 기록에 따라 가장 오래된 다리로 알려진 ‘노지다리’를 빼놓을 수 없다”면서 “당시 흙다리였던 만큼 잦은 범람으로 자주 무너져 내리기도 했으나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돕는 유일한 출입구였다”고 말했다.

이어 “굽이치던 광주천이 이제는 직강화 되고, 콘크리트 다리들이 세워졌으며 현대에 맞게 석서정이 복원돼 있지만, 광주천 노지다리 복원 및 관련 문화 사업도 고려돼야 한다”면서 “광주천을 중심으로 역사 문화 자원과 상권이 연계돼 광주공원 일대가 상생발전하기 위해서는 지자체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덧붙였다.

/오승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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