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21일(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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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동반도는 고대에 오랫동안 우리 민족이 다스렸다
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중국의 신해양실크로드 거점, 산동반도 (3)

  • 입력날짜 : 2015. 07.23. 19:47
고대 시대에 한반도 인이 지배했던 산동반도.
중국의 산동성, 우리나라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중국 땅이다. 고대로부터 우리 한민족과 가장 많이 교류한 지역이기도 하다. 한 때는 우리 민족이 지배하는 경우도 있었다. 발해의 장문휴 장군의 지배, 50년에 걸친 이정기 일가의 국가 건설, 장보고 대사의 해상왕국 건설 등이 그것이었다. 이들이 남긴 흔적과 향기를 찾아가 더듬어 봤다.

▶ 산동반도를 지배한 발해의 장군 ‘장문휴’
장문휴 장군이 지배했던 ‘봉래항’
산동반도는 732년 발해의 장군 장문휴가 수군을 이끌고 쳐들어가 점거한 곳이다. 그는 등주를 거점으로 일시적이나마 산동반도를 점거했다.

당시 흑룡강 하류에 있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인 발해가 강한 면모를 보이자, 위협을 느낀 당나라는 흑수말갈을 치기로 명했다. 발해 왕의 아우 대문예(大門藝)가 당나라에 망명하고 ‘좌효기장군(左驍騎將軍)’이란 벼슬까지 얻자, 발해는 장수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당나라의 산동반도를 공격하도록 했다(732년).

장문휴는 등주를 점거하고, 그곳의 지방장관인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였다. 이에 당은 당황해 신라인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을 통해 신라와 연락해 지원병을 요청했고, 신라는 발해 남쪽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뿐만 아니라, 일설에 의하면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 역시 고구려 유민이란 설이 있다. 그도 역시 이곳 산동반도 영주에 있는 고구려 유민 집단거류지에서 살다가 흑룡강 하류로 가서 발해를 세웠다고 한다.


▶ 4대 55년간 다스린 이정기 일가
△이정기(李正己, 732-781)는 누구인가?
이정기 일가가 도읍으로 삼았던 ‘청주’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많은 이들이 당나라로 끌려갔다.

고구려 유민들은 곳곳에 흩어져 살게 했다. 단합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 중에서 요하(라오허강) 서쪽 영주(營州) 땅에는 고구려 유민들이 가장 많이 살았다. 대조영도 이곳 사람으로, 만주로 가서 발해를 건국하기도 했다. 영주에 남은 유민들 후손 가운데 이회옥(李懷玉)이 있었다.

그는 732년 태어나 당나라의 군인이 되었다. 755년 ‘안녹산 난’이 일어났다. 후희일이 이끄는 평로군(平盧軍)의 비장(裨將)으로 출전했다. 후희일은 이희옥 고모의 아들이었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 평로군에는 다수의 고구려 유민 출신이 있었다. 당시 건강한 신체와 담대한 용기와 힘은 군대에서 출세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 독립된 왕국의 임금이 되다

761년 평로군은 발해만을 건너 산동반도 등주(登州)로 상륙했다.

안녹산의 잔당인 사조의(史朝義) 군대를 토벌하기 위해서였다. 안녹산 잔당이 토벌되자, 후희일이 차츰 태만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회옥의 인기는 계속 올라갔다. 765년 후희일을 내쫓고 그를 절도사로 추대했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그에게 정기(正己)라는 이름을 줬다. 이 때부터 그는 이정기라고 불렸다.

당시 산동반도 일대는 발해와 신라로부터 오는 물자가 모이는 요충지였다.

이정기는 발해와 신라와의 교역을 토대로 크게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정기는 차츰 세력을 키워갔다.

775년에는 산동일대 10주를 복속을 떠나, 당나라 최대 요충지인 서주(徐州)를 비롯한 15개주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절도사들이 7-9주 땅과, 5만-9만 군사를 거느린 것에 비해, 그는 10만명이 넘는 군사력, 한반도에 버금가는 면적, 인구 540만(84만호)을 달하는 사실상 독립된 왕국의 임금이었다.

당나라 최대의 강력한 번진(藩鎭)이 됐다. 당시 일부 번진들은 그는 거둔 세금을 상공(上供)하지 않고 자립하려했다. 이정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 당나라와 전쟁을 하다

이정기의 힘은 단순히 영토와 군사력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이정기는 백성들의 지지도 얻고 있었다. 황제의 위상을 가질 만큼 권력이 강해지고 있었다. 당시 산동지역은 당나라 전체 소금 생산량의 절반에 차지하는 염전이 있었다. 당나라 곡물의 10%를 차지할 만큼 비옥한 농토도 있었다.

또한 발해 및 신라와의 무역 이익도 누리고 있었다.

779년 이정기는 치청을 청주에서 수도 장안과 가까운 운주로 옮겼다. 장안을 쉽게 공격하기 위에서였다.

결국 781년 전쟁을 일으켰다. 이정기는 강회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대운하를 손에 쥔 이정기는 당나라 수도 장안을 향한 공격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아들이 제나라를 세우다

그러나 그해 여름, 이정기가 암으로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의 아들 이납이 지위를 계승했다. 782년 국호를 제(濟)라 칭하고 왕위에 올랐다.

792년에 이남이 죽자 그의 아들 이사고(李師古)가 뒤를 이었다. 806년 이사고가 죽자, 이복동생 이사도(李師道)가 계승했다.

이사도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특별 조치를 강구했다. 다름 아닌 장보고가 속해 있던, 서주(徐州) 무령군(武寧軍)에게 토벌할 것을 명령했다.

장보고가 이끄는 무령군에 의해 819년 이사도가 피살되어 버린다. 평정 후, 장보고는 무령군중소장(武寧軍中小將)의 직책을 받게 된다.

당시 장보고는 어려서 신라의 골품제도의 한계를 느끼고, 청년기에 친구 정년(鄭年)과 함께 당나라에 건너가, 무과에 급제해서 높은 무관이 되었던 인물이다.

이로써 제나라는 4대 55년간 이정기 일가가 권력을 세습하는 독립 국가를 이룩했던 것이다. 그는 고선지와 더불어 고구려 유민들 가운데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고선지가 당나라의 충실한 장군으로 생애를 마친 것에 비해, 그는 당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난 독립된 나라를 건설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될 수 있는 인물이다.

한국사의 입장에서는 고선지에 비해 이정기를 더욱 높게 평가해야 마땅하다고 하겠다.




▶ 장보고의 지배와 해상활동
장보고 대사의 거점 ‘석도진’

장보고는 이정기 일가가 다스려 온 ‘제(濟)나라’를 멸망시킨 후, 당시 산동반도에 많은 신라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점을 살려, 자신의 세력을 쌓는다. 어느 정도 자시의 기반이 마련되자, 그는 신라로 828년에 귀국했다.

당시 신라 왕에게 완도에 군사 거점을 세워줄 것을 청했다. 마침내 승인을 얻어 1만여 명의 군대를 확보한 그는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세우고 대사(大使)가 됐다.

해적을 소탕한 후, 동중국해 무역을 독점하였다.

그의 활약으로 827-835년 이후로 해상에서 신라 노예를 매매하는 일이 사라졌다고 ‘삼국사기’는 평가하고 있다.

산동반도에 신라인을 위한 집단거지를 마련하고 신라방, 신라소 등을 설치함과 동시에 적산촌에 법화원(法華院)을 건립하고 이를 지원했다. 사실상 산동반도를 지배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장보고의 암살과 함께, 산동반도도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
장문휴 장군, 이정기 일가, 장보고 대사에 의해 오랫동안 지배해 온 산동반도는 이후 우리 역사에서 멀어졌던 것이다.


kj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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