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흘산 자락 경사지에 층층이 석축을 쌓아 만든 다랭이논은 척박한 땅을 일궈 만든 예술품이다.

남해에 봄이 오고 있다. 땅 속에 납작 엎드려 있던 풀들이 불쑥불쑥 솟아나기 시작하고, 매섭던 바람도 어느새 무뎌졌다. 매화꽃이 하얗게 꽃망울을 터뜨리고, 큰개불알꽃이 앙증맞게 꽃을 피웠다. 문턱을 막 넘어오는 봄을 맞으러 남해로 향했다. 남해군에서도 남쪽에 위치한 가천 다랭이마을은 어느 곳보다도 봄이 빨리 찾아오는 곳이다. 가천마을에 내려서자 내륙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훈풍이 우리를 맞이한다. 남쪽으로 드넓게 펼쳐지는 푸른 바다에서도 봄기운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남해 바래길 2코스는 가천 다랭이마을에서 시작된다. 가천마을 다랭이논은 아기자기한 암봉을 이루고 있는 설흘산 자락 가파른 경사지에 층층이 석축을 쌓아 만들어졌다. 산비탈에 만들어진 논이다 보니 평지의 논에 비해 폭이 좁다. 다랭이논 앞으로는 푸른 바다가 거침없이 펼쳐진다. 다랭이논의 아름다움은 척박한 땅을 일궈 생계를 유지하려는 우리의 선조들이 만들어낸 예술품이다.

가천다랭이마을 아래쪽에 있는 암수바위. 마을사람들은 이중 수바위를 미륵불로 봉안하고 매년 제사를 올린다.

가파른 경사지를 따라 내려가면 마을 아래쪽에 특이하게 생긴 암수바위를 만나게 된다. 암수바위는 남자의 성기를 닮은 높이 5.8m, 둘레 1.5m의 거대한 수바위와 아기를 밴 배부른 여인 형상의 높이 3.9m, 둘레 2.5m 암바위를 가리킨다. 이런 암수바위를 설흘산이 내려다보고 있다.

다랭이논에서는 겨울을 견딘 마늘이 푸릇푸릇 생명력을 과시한다. 다랭이논에서 나물을 캐는 할머니의 모습에서도 봄기운이 물씬 풍겨진다. 바래길은 가파른 경사를 이룬 해변 위쪽으로 나 있다.

다랭이논 아래 바래길에는 두 개의 팔각정자가 있다. 팔각정자에 앉아서 다랭이논과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으니 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동쪽으로는 노도와 앵강만 건너편의 산들이 붕긋붕긋 솟아 바다와 어울린다. 남서쪽에서는 여수의 돌산도와 금오도가 손짓을 한다.

다랭이논을 지나자 숲길로 이어진다. 숲길을 걷다가 발길을 멈추면 파도가 조용히 말을 걸어오고, 파도와 밀어를 나누고 있으면 바람이 시샘을 하며 다가와 내 볼을 쓰다듬는다. 숲길이 지루할 쯤이면 어느새 전망 좋은 곳이 나타나 앵강만과 남해 금산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숲은 참나무 같은 활엽수와 함께 후박나무·동백나무 등 난대림이 사이좋게 공존한다. 난대림을 만날 때면 따스한 남녘 섬 길을 걷는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앵강만은 금산과 호구산, 송등산, 설흘산이 포근하게 감싸여 잔잔한 호수같은 느낌을 준다.

숲길을 벗어나면 앵강만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앵강만과 접해있는 두곡·월포 인근에 비가 유난히 오는 밤이면 꾀꼬리 울음소리가 나 앵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전설이 있어 꾀꼬리 앵(鶯)자를 써서 앵강만(鶯江灣)이라고 했다는데, 이는 하나의 설에 불과하다.

앵강만은 금산과 호구산, 송등산, 설흘산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고, 앵강만 입구에서는 노도가 수문장 역할을 한다. 내륙 깊숙이 파고 든 앵강만은 홍현, 두곡, 용소, 화계, 신전, 원천, 벽련마을을 품고 있다. 앵강만 가운데에는 바위로 이뤄진 두 개의 작은 섬, 형제도가 떠 있다.

홍현마을과 해변 사이에는 방풍림으로 조성된 숲이 바닷바람을 막아준다.

홍현마을 앞바다에 이르자 반원 형태의 석방렴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석방렴은 약간 경사진 바닷가에 썰물 때도 바닷물이 남아 있는 곳을 선정해 만들어졌다. 석방렴은 밀물 때 돌담 안으로 들어와서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한 고기들을 돌담 밑에 뒀던 통발을 들어 올리거나, 통발을 넣지 않고 석방렴 안의 조수가 절반이상 빠졌을 때 뜰채로 떠올려 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남해 미국마을. 모국에 돌아와 노후생활을 즐기고 싶은 재미교포들을 위해 만들어진 마을이다.

홍현마을 앞 해변에 서 있으니 금산과 호구산 같은 산들로 둘러싸인 앵강만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노도 뒤로는 원뿔형으로 솟은 소치도라는 작은 섬이 망망대해를 비취는 등대처럼 서 있다. 홍현포구에는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고, 포구 뒤로 숙호해변이 가깝게 다가온다. 홍현마을을 지나 숙호해변에도 방풍림으로 조성된 숙호숲이 해변을 따라 이어진다.

길은 월포해변과 두곡해변으로 이어진다. 바다 해안이 두곡과 월포 두 마을을 잇고 있는 두곡·월포해수욕장은 활처럼 휘어져 있는 모양인데 옛날에는 지형을 본 따 ‘순월개’라 불렸다.

해수욕장은 폭이 70m 정도로 좁은 편이지만 900m 길이에 달한다. 남해의 대표적인 해수욕장인 상주해수욕장이 앞으로 툭 터져 시원스럽다면, 이곳 두곡·월포해수욕장은 앵강만 안쪽에 위치해 안온한 느낌을 준다.

경사진 바닷가에 타원형 돌담을 쌓아 만든 석방렴은 원시적인 고기잡이 시설이다.

해수욕장 안쪽으로는 길게 방풍림이 조성돼 평소에는 바람으로부터 마을과 농경지를 보호해주고, 마을주민들과 여름철 해수욕장을 찾은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막이 돼준다. 해변 곳곳에 펜션들이 자리를 잡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안식처가 돼준다.

미국마을로 가는 길에서는 푸른 바다와 앵강만을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 그리고 산자락에 형성된 마을과 농경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바다와 주변풍경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니 해변에서 보는 바다와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밭가에 서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도 이런 풍경을 즐기며 행복해한다. 하얗게 꽃을 피운 매화가 봄 향기를 전해준다. 봄은 사람들의 마음에도 봄기운을 심어줘 움츠렸던 가슴이 활짝 펴진다.

호구산 자락에 자리를 잡은 미국마을에 닿는다.

미국마을에 서 있으니 앵강만과 노도가 한눈에 바라보이고, 금산이 앵강만 건너에서 미소를 짓는다. 봄볕에 반짝이는 바다가 미국마을을 한없이 따스하게 해준다. 미국마을은 미국풍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22가구의 주택과 민박형 펜션으로 이뤄져 있다. 삼동면의 독일마을이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은퇴 후 모국생활을 위해 조성된 마을이라면, 이곳 미국마을은 모국에 돌아와 노후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재미교포들을 위해 만들어진 마을이다.

미국마을에서 도로를 건너 농로를 따라 해변으로 나아간다. 앵강만은 썰물이 돼 해변바닥을 드러내고, 바다는 비릿한 갯내음을 전해준다. 물 빠진 해변에서는 조개를 잡는 할머니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앵강만 가장 안쪽에 있는 화계해변과 신전해변에는 썰물 때면 넓은 갯벌이 드러난다. 이곳 갯벌은 여름이면 생태체험장으로 활용된다. 화계마을을 지나니 해변에 잘 조성된 신전숲이 기다리고 있다. 신전숲은 앵강만 안쪽 해안가 1천 평에 이르는 넓은 땅에 수백년 된 상수리나무 등으로 조성된 방풍림이다.

남해 바래길 2코스는 신전숲에서 원천마을을 거쳐 벽련마을까지(신전숲에서 5.4㎞) 이어지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신전숲을 나서는데 앵강만에 비췬 햇살이 잔잔하게 부서진다.


※여행쪽지

▶ 남해 바래길 2코스는 가천다랭이마을→홍현해우라지마을→숙호숲→월포·두곡해수욕장→미국마을→신전숲→원천마을→벽련마을까지 18㎞에 6시간이 걸린다.

▶ 신전숲과 벽련마을 사이에 위치한 원천마을에는 몇 군데의 횟집이 있다. 그중에서 원천횟집(055-862-3033)의 회덮밥(1만3천원)이 인기 있다. 이 식당에서는 각종 회와 매운탕도 맛볼 수 있다. 걷는 도중에 식사를 하려면 홍현마을 1024번 지방도로변에 있는 산들해식당(055-862-2929)의 장어탕(8천원)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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