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모래밭과 에메랄드빛 바다, 그리고 검은 현무암이 어울린 함덕서우봉해변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오랜만에 제주도에 왔다. 나는 제주도에 올 때마다 올레길을 걷는다. 오늘은 19코스를 걷기 위해 조천만세동산 앞에 선다. 만세동산에는 제주항일운동기념관이 조성돼 있다. 이곳 만세동산에서는 1919년 3월21일 항일만세시위가 있었다. 만세동산에서 시작된 항일만세시위는 다음 날인 3월22일부터 24일까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조천장터에서 진행됐다. 조천만세운동은 제주주민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이후 제주지역 항일운동의 모태가 됐다.

정문에서 애국선열추모탑까지 길게 이어지는 길을 걸어가는데 나도 모르게 마음이 가다듬어진다. 오른쪽 만세동산에는 3·1독립운동기념탑이 서있다. “일제는 물러가라”는 함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항일기념관에 들어서니 현관에서 만세운동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맞이하고, 전시실 안에는 제주의 항일운동자료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만세동산 뒤로 나아가니 농로가 이어진다. 밭가로는 어김없이 밭담이 쌓여있고, 밭작물은 바람을 막아주는 현무암 담장의 보호를 받으며 자란다. 올레길은 밭담길을 지나 해변길로 접어든다. 맑은 날씨에 공기가 더없이 맑고 상쾌하다. 도회지에서는 평상시에도 상쾌한 공기를 맛보기 힘든데다 미세먼지로 인한 대기오염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어 오늘 같이 맑은 날씨를 만나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른다.

하트 모양의 함덕서우봉해변 백사장 가운데에는 모래언덕이 형성돼 있고, 모래언덕 앞으로 현무암이 뛰쳐나가 형성된 올린여가 있다.

잠시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데, 검은 현무암너머로 출렁이는 푸른 바다가 눈부시다.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면 파도가 속삭이듯 말을 걸어온다. 파도와 대화를 나누다보니 내 마음도 바다처럼 거침이 없어진다. 하늘을 거침없이 날아다니는 새처럼 자유로워진다.

뒤돌아보면 신촌과 원당봉, 제주항과 사라봉이 손짓한다. 해안도로에서 벗어나 북쪽으로 삐져나간 해변을 걷다보면 끄트머리에 독사머리처럼 불쑥 솟은 현무암으로 이뤄진 곶이 있는데, 이를 관곶이라 한다. 이곳은 물살이 세서 ‘제주의 울돌목’이라 불린다. 관곶은 제주도에서 육지의 최남단 해남 땅끝까지 제일 가까운 거리로 84㎞에 불과하다.

관곶을 지나 신흥리로 가는 해변길은 정말로 호젓하다. 호젓한 해변길을 걷고 있는 두 여성을 만났다. 친구 사이인 두 여성은 수원에서 1주일 일정으로 올레길을 걷기 위해 왔단다. 이들은 어제 18코스를 걷고 오늘 19코스를 걷는 중이라 했다.

북촌주민 300여명이 같은 날 집단으로 학살당한 북촌마을주민학살사건은 제주4·3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다. 학살현장에 세워진 ‘너븐숭이 4·3기념관’.

“집안 살림을 하는 입장에서 1주일을 비우기가 쉽지 않을 텐데.”

“남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큰 맘 먹고 왔어요.”

“올레길 걸어보니 어떠세요?”

“다 잊어버리고 친구하고 천천히 걷다보니 너무 행복해요.”

신흥리 쪽으로 방향이 틀어지니 함덕해변 뒤쪽에 있는 서우봉이 모습을 드러낸다. 비슷한 풍경 같지만 구불구불 돌아가는 해변길은 방향에 따라 새로운 경관을 보여줘 지루하지 않다. 바닷가에는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추우면 불을 쬐거나 휴식을 취하는 불턱도 보인다.

작은 만을 이룬 신흥리 앞 바다에는 방사탑 4기가 세워져 있다. 그 중에서 2기는 바다에 서 있다. 제주도 주민들은 마을의 액운을 방지하기 위해 마을 입구나 해변에 방사탑을 세웠다. 원통형으로 쌓은 돌무더기는 탑 모양을 하고 있고, 돌무더기 위에는 돌하루방이나 새 모양의 자연석을 세웠다.

서우봉 비탈을 오르다가 함덕서우봉해변을 바라보면 곱다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아름다운 바다를 발아래 두고 걷는 즐거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올레길은 함덕서우봉해변으로 이어진다. 함덕은 서쪽 끝에 포구가 자리를 잡고 있고, 동쪽 끝에는 서우봉이 솟아 있다. 함덕포구에는 작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다. 함덕항 방파제에 서니 동쪽으로 하트 모양의 함덕서우봉해변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함덕항 방파제 근처 얕은 바다에서는 10여명의 해녀들이 물질을 하고 있다. 가까이 가서보니 해녀들의 숨비소리가 들려온다. 이곳에서 해녀들은 전복과 소라, 성게 등을 채취한다.

방파제를 출발해 함덕해변을 따라 걷는다. 해변은 마침 밀물 때라서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다. 조개껍질이 잘게 부서져 형성된 백사장은 희고 부드럽다. 흰 모래사장은 맑은 바닷물을 더욱 빛나게 해준다. 하얀 모래밭과 에메랄드빛 바다, 그리고 검은 현무암이 어울린 함덕서우봉해변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백사장 가운데에는 모래언덕이 형성돼 있고, 모래언덕 앞으로 현무암이 뛰쳐나가 형성된 올린여가 있다.

아직은 해수욕을 하기에는 이르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함덕해수욕장 모래사장에서 한가로움을 즐기고 있다. 서우봉 아래 모래언덕을 지나 서우봉 비탈로 오른다. 서우봉에는 함덕서우봉해변을 내려다보며 걸을 수 있도록 둘레길이 조성돼 있다.

서우봉 비탈을 오르다가 함덕서우봉해변을 바라보니 곱다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아름다운 바다를 발아래 두고 걷는 즐거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몇 발자국 걷고 돌아보기를 반복한다. 한라산과 주변의 수많은 오름들도 한눈에 담긴다.

서우봉 능선을 넘으니 북촌해변이 정면으로 펼쳐진다. 구좌읍 쪽으로 여러 오름과 풍력발전기들이 드넓은 평지에 드문드문 솟아 있다. 북촌마을 앞에 떠 있는 작은 섬 다려도가 바다인 듯 섬인 듯하다. 울긋불긋한 건물들이 검은 현무암, 푸른 바다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모습은 자연과 인공이 만들어낸 풍경화다.

북촌리 해동마을 작은 포구를 지나 잠시 바다와 헤어진다. 서우봉에 기대고 있는 밭길을 따라가니 ‘너븐숭이 4·3기념관’이 있다. 1949년 1월 17일 이곳 너븐숭이 인근 북촌초등학교 주변 들판에서 북촌주민 300여명이 집단으로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행했다. 한 마을에서 300여명의 제사를 같은 날 지낼 정도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북촌마을주민학살사건은 4·3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다.

너븐숭이를 지나 해변으로 나아가니 일부가 남아 있는 환해장성 너머로 바닷물이 출렁인다. 북촌포구 앞으로 다려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동복리 원시림을 벗어나자 드넓은 밭이 펼쳐진다. 묘산봉 근처를 지나자 김녕리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4차선 동일주도로를 건너 김녕리로 내려선다.

골목길은 점차 바다로 이어지고 이내 김녕항에 닿게 된다. 윤슬이 만들어진 바다는 보석처럼 반짝인다. 김녕항 방파제에 서니 멀리에서 한라산이 듬직하게 서 있고, 가까이에서는 묘산봉이 김녕리 마을 지붕위로 붕긋 솟아있다. 드넓은 군청색 바다에 기대고 있는 김녕리 마을은 한없이 조용하다. 마을의 한적함을 달래주려는 듯 파도가 다가와 감미로운 음악을 들려준다.


※여행쪽지

▶제주올레 19코스는 조천만세동산→함덕서우봉해변→북촌포구→동복리 마을운동장→김녕서포구까지 걷는 길로 19.6㎞ 거리에 6-7시간 정도 걸린다.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20분 간격으로 다니는 701번 시외버스를 타고 조천체육관에서 하차한다. 40분 소요. 조천체육관 버스정류장에서 길을 건너면 만세동산이다.
▶제주올레 19코스에는 함덕서우봉해변에는 많은 식당이 있고, 북촌포구 ‘북촌 방·루’에서는 전복돌솥밥(1만5천원), 전복뚝배기(1만5천원), 성게미역국(1만원)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북촌마을을 벗어나면 김녕서포구까지는 식당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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