龜巖寺初秋(구암사초추)
만해 한용운

가을 되니 마음 맑고 달빛 달린 박꽃 흴 때
서리 앞 남쪽 골짜기 단풍 숲 속삭임에
몇 잎 새 겨우 붉어졌구나, 서너 가지 끝에서.
古寺秋來人自空 匏花高發月明中
고사추래인자공 포화고발월명중
霜前南峽楓林語 見三枝數葉紅
상전남협풍림어 재견삼지수엽홍


거북은 기린·봉황·용과 더불어 ‘4령’(四靈)으로 불린다. 기록에 의하면 1천살 먹은 거북은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고 털이 난다고 했다. 중국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일대에서 거북은 신령스러운 동물로 여겨졌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구지가’(龜旨歌) 노래에서 거북은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을 드러내게 하는 동물로 등장한다. 이러한 의미를 담는 구암사를 찾아 초가을을 맞이하는 심회를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서리 앞 남쪽 골짜기 단풍나무 숲의 속삭임에(龜巖寺初秋)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으로 승려시인, 독립운동가다. 18세 때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피신해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 출가해 승려가 됐다.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을 닦았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옛 절에 가을이 되니 마음만은 저절로 맑아지고 / 달빛 속에 높이 달려있는 박꽃이 희구나 // 서리 앞 남쪽 골짜기 단풍나무 숲의 속삭임에 / 서너 가지 몇 잎 새만이 겨우 붉어졌구나]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구암사 초겨울의 단상(斷想)]으로 번역된다. 구암사는 여러 군데가 있다. 충남 금산, 대전 유성, 경북 울진, 전남 순창, 전남 진도 등 5군데에 이른다. 구암(龜巖)이란 이름이 좋았던 모양이다. ‘오래 사는 거북처럼 우뚝하게 서 있는 바위’라는 뜻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을이면 오곡백과가 무르익기 때문에 마음이 절로 맑아졌다. 그래서 시인은 옛 절에 가을이 되니 마음이 절로 맑아지고, 달빛 속에 높이 달린 박꽃이 그지없이 희다는 시상을 펼쳐 보인다. 선경이라고 했지만 달빛 속에 높게 달린 박꽃이라는 시심은 한껏 차원이 높아 보인다. ‘흰 꽃=둥근 박=밝은 달’을 동격으로 생각해 보인 시상이리니.

화자는 단풍나무는 제 각기 자랑했던 색깔이 서리 앞에서 맥을 추지 못했다고 했다. 화자는 이를 시상의 얼개에 촘촘하게 얽혀 놓았다. 서리 앞의 남쪽 골짜기 단풍나무 숲 속삭임에 서너 가지 몇 잎 새가 겨우 붉어졌다는 시어들 때문이다. 단풍나무는 무엇이라고 속삭였을까? “너희들 고까옷을 입고 자랑했지만, 내 입김 스치고 나면 어림없을 걸”이란 메시지 한 마디 쯤은 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자와 어구

古寺: 옛 절. 秋來: 가을이 오다. 가을이 되다. 人: 사람. 自空: 저절로 비다. 저절로 맑다. 匏花: 박꽃. 高發: 높이 발하다. 月明中: 밝은 달빛 속. // 霜前: 서리 앞에. 南峽: 남쪽 골짜기. 楓林語: 단풍나무의 속삭임. : 겨우. 見三枝: 서 너 가지가 보이다. 數: 몇 개. 葉紅: 붉은 나무 잎.

<시조시인·문학평론가 (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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