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6(목)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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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꿈을 키워왔던 그는 성장을 거듭하면서 광주에서 진보적 미술단체에 소속돼 활동 했지만 집단창작에 나서지도, 휩쓸리지도 않고 홀로 그림을 연마했다. 역사를 거듭 깨우침은 자기미학의 아우라 구축과 예술의 양식과 붓놀림에 세련미를 더하게 했다. 모든 사물의 본질을 읽어가고 역사의 주인인 민중에게 겸손함을 학습하며, 고향 바다와 들판, 그 풍경에서 우러나는 감동의 울림을 정스러움으로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밝은 세상의 투박한 풍경이지만 가볍지가 않고 오히려 역사의 장엄함이 배여 있으며 인물은 섬세하지 않지만 삶을 통한 민중의 고통과 현실을 담아냈다. 그는 지금도 예술을 통해 역사와 현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통찰하며 어두움 속에서도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읽어가는 민중의 물빛 서정성으로 키워가고 있다.
▶‘연좌제’에서 출발한 ‘5월 시민군’
송필용의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날 할아버지는 “너는 집안의 장손이니 이제 알아야 한다. 공무원이나 군인, 경찰에는 나갈 수 없다. 그러나 반듯이 출세해야 한다.”는 말씀을 해줬다. 당시 무슨 뜻인지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고향의 바다와 들판을 뛰어다니고 분청사기 가마터(고흥군 운암산)에서 도자기 파편들도 주워 모았다. 그가 출생하기 전, 진보적 사상의 백부는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돼 피신하면서 ‘백아산’입산 후 행방불명 됐다. 또한 백모는 진압대에 죽임을 당한 후 시신도 찾지 못했고 살던 집은 소각됐다. 그 일로 온 가족은 뿔뿔히 흩어져 수년간 고향을 떠나 피해 있다가 다시 모여 살았다고 한다. 집안에 둘째였던 그의 부친은 백부를 대신한 장남으로 농사를 짓는 것 외에 다른 삶은 허락되지 않았다. 가족 모두가 이데올로기 무게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가족사의 고통과 어려움에서 벗어날 다른 대안이 없었으며 ‘연좌제’라는 감시와 무거운 어두운 긴 그림자는 늘 따라다녔다.
송필용은 ‘연좌제’를 피부로 느낄 무렵은 대학 입학을 전후해서일 것이다. 대학입학 시기는 크고 작은 시위집회가 거의 매일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었다. 민주화의 과정 속에 있었던 불운한 세대로 일정한 성과를 이뤘지만 그만큼의 고통과 아픔을 감수해야 했었다. 오전에는 수업을, 오후에는 시위참여를 반복하던 3학년(1979), 그는 경찰에 두 번이나 체포됐다. 한번은 시위현장에서 체포돼 훈방으로 풀려났고 두 번째는 학교 수업도중 형사가 찾아와 체포됐다. 경찰서로 끌려가 2박3일간의 모진 폭력에 온몸은 피투성이로 멍이 들고 얼굴은 부어올라 병원에 2주간 입원을 해야 했다. 이러한 시간 중에도 늘 과거 집안일(연좌제)의 두려움이 있었으나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젊은 피의 뜨거운 가슴을 자제를 시키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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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18일, 계엄령이 선포된 학교정문에서 공수부대와 학생의 사이에 등교를 두고 다툰 싸움은 금남로로 확대되면서 5·18은 시작됐다. 주저없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각목과 소총을 잡고 버스와 트럭에 몸을 실고 구호를 외쳐야 만했다. 그래야만 가슴에 응어리진 울분을 달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매일 금남로 분수대 앞에 모여서 결기를 다지고 적십자병원, 전남대병원, 조선대병원, 전남도청 상무관을 오가면서 시신을 옮기는 자원봉사와 시민군을 번갈아 가면서 역할을 해야만 했었다.
대학에서 미술사를 통한 올곧은 역사에 새롭게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5월 광주’는 다시 다가오게 됐다. 민중의 깨우침도, 시대의 정당성도 지향해야 하는 예술을 찾아가는데 나침판이 됐다. 자기예술의 형상성을 연구했던 시간은 새로운 이론적 무장과 함께 시대의 정당성을 기록하고 역사 앞에 증언하는 현실참여 예술을 출발시키기엔 충분했다. 자본주의 사회체계에서 계급과 합리적 부의 분배는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 것일까? 현실을 어떠한 형상력으로 구현할 것인가? 등의 미학적 화두를 서두르지 않고 고민을 반복했다. 그의 느긋하고 차분한 성격의 반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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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대형작품인 150호 크기의 두루마기 캔버스에 ‘5월 광주’를 주제별로 나눠 10점을 제작한다. 그러나 가난했던 청년기 시절 소홀한 보관으로 작품은 아쉽게도 망실되고 남아있는 1점은 ‘학살-금남로’(1986)다. 이 작품은 공수부대가 금남로 시위대 진압을 그린 작품으로 그 긴박한 순간을 포착했다. 우선 27세의 청년작가로 150호 대형 두루마기 10점을 제작했다는 규모면에서 놀랍기도 하지만 높은 완성도 또한 놀랍다. 쫓고 쫓기는 긴박함을 담는 붓질과 핏빛의 흔적은 더욱 긴박감을 강조시킨다. 흰색의 강한 붓질 속에 함축된 형상은 ‘연좌제’에서 출발한 ‘5월 시민군’의 정의롭고자 했던 뜨거운 열정과 용기가 조형적 담대함으로 환생하는 분노이자 시대의 정당성이다.
▶‘땅의 역사’에서 찾아가는 서정성
그는 그렇게 뜨거웠던 광주에서 80년대를 관통해오면서 쉬지 않고 역사 탐구와 시대분석으로 예술적 예지력을 확장시켜가며 현재를 형상화시켜 갔다. 더러는 자신과 시대의 모순으로 갈등을 겪어야 했을 것이며, 형상을 이끌어 내는 고통스러움과 끊임없이 싸움을 해야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듭하면서 냉정과 성찰을 통한 내면에는 뜨거움을 삭히고 또 삭혀가면서 캔버스를 지우고 다시 붓을 잡기를 반복하면서 점차 예술관과 세계관은 담대해지고 확장돼 가고 있음을 작품으로 증명해줬다. 우리 강산, 남도 땅에서 근대가 시작돼갔던 ‘동학’에서부터 ‘광주 5월’까지 100여년의 역사를 한눈에 읽어가는 17m의 대 서사시를 완성한다.
그의 작품 ‘땅의 역사’(1989)는 한국 근·현대사에 중요한 시점인 동학을 기점으로 백산과 황토현의 붉은 땅, 일제강점기의 독립군, 6·25전쟁과 광주5·18까지를 파노라마 형식으로 차분한 역사적 서사를 묵직함으로 담아냈다. 그리고 마지막 끝부분에 그의 딸을 그려 넣어 미래세대의 희망을 담았다. 물론 28세의 청년화가의 거친 사건위주의 역사접근 방식과 인물, 땅, 하늘의 처리에 다소 아쉬움이 있다하겠으나 중요치는 않다. 젊은 나이에 예술적 용기와 역사를 바라보는 담대함에 경의를 표할 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작품을 비롯한 또 다른 대작인 ‘샘’, ‘정화수’ 등을 들고 서울과 광주 순회전(1989)은 많은 사람들은 놀랐고 그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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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필용은 백부와 함께 많은 죽음이 갇혀 있을 ‘백아산’을 주제로 작품을 제작한다. 작품 ‘땅의 역사-일어서는 백아산’(1995)은 백아산 안에 용암이 끌어오는 듯 부풀어 몽실몽실 피어오르게 하는 강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백부를 비롯한 수많은 죽음들이 이루지 못한 세상에 대한 응어리진 억울한 한(限)이자 분노일 것이다. 예술로 백부의 한과 분노의 형상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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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시 우리 땅의 정신과 역사탐구 탐구를 위한 전남의 가사문화권과 금강산의 아름답고 화려한 땅의 진경을 담아낸다. 가사문화권은 조선시대 선비문화인 시가문학의 응축된 산실로 불의에 맞서고 절제된 삶의 원천이기도 하며, 유교와 도교, 자연주의 사상이 응축돼 자기성찰이 요구되고 있는 곳이다. 이렇게 전통의 정신이 뿌리 깊은 장소를 전통회화 기법중 하나인 ‘부감법’으로 산하를 확장시켜 바라보고 소쇄원과 면앙정, 송광정과 정자나무와 대나무, 소쇄원 물길에 집중시켜 작품을 제작했다. 가사문화권 연작은 전통의 교훈과 정신을 자연풍경에 담아 투박하고 정감어린 서정적 어법으로 나름의 성과를 거둔다. 그리고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시대를 바라보는 예술가의 책무감이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한다. 그러한 연장선에서 사계절 금강산을 확인하고 더욱 확장된 우리산하의 역사와 (겸제)정선의 진경정신을 탐구로 금강연작에 몰입한다. 제작방법은 ‘부감법’(俯瞰法)과 ‘조화기법’(彫花技法·물감을 긁어서 그리는 조선 초기 분청사기 음각기법)으로 금강산 구석구석을 서정적 어법으로 담아냈다. 이러한 과정이 쌓이면서 역사를 바라보는 건강한 예술가의 정신을 탐구한다.
두가지 작품경향은 과거와 크게 변화된 면모를 확인하게 된다. 과거의 작품과 차별성은 독창적 미학어법으로 서정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표현성이 강한 현실적 사실주의 미학어법을 앞세우지 않고 더욱 성숙된 서정성을 앞세워 우리 산하를 전통회화 양식을 현대적 해석을 통해 도입한다. 이러한 작품변화는 높은 미학적 평가를 이끌어 놓았으며, 미술시장에서도 긍정적 반응을 이끌게 됐다. 이는 민중미술이라면 거칠고 무서운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는 이미지를 벗게 해주는 충분한 사례가 돼 주고 있다.
▶역사의 덩어리와 민중의 물빛 외침
송필용은 역사를 읽어가는 새로운 소재를 바위덩어리와 폭포로 찾아간다. 대형 캔버스 위의 큰 바위덩어리는 역사의 집약처일 것이다. 바위는 오랜 세월을 그 자리를 지켜가면서 민중이 어떻게 살아 왔던가를 지켜본 응축된 역사이며, 역사의 상흔이 쌓이고 쌓인 덩어리이자 주체인 민중이다. 폭포의 물줄기는 시대별의 수많은 세파와 외세이자 또한 웅장하면서 올곧은 민중의 외침으로 은유되고 있다. 바위와 폭포의 단순한 이미지가 대형화면에 집중돼 채워진 조형방식이다. 그리고 화면에 색감이 마르기 전에 즉흥적인 선을 긋는 분청사기의 ‘조화기법’은 어린 시절 고향의 분청사기 터에서 입력된 투박한 미감을 되살렸다.
지난 금강산 실경에서 축척된 ‘조화기법’은 그만의 집중력을 요하는 독자적인 미학어법으로 조형미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그리고 그 선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자유분방하고 두터운 역사형상의 깊이와 아우라로 충의와 곧은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최근의 폭포연작 역시 곧은 역사와 민중의 외침은 거칠고 투박한 물빛의 서정성과 함께 어울려져 있다. 서정성은 예술을 감동시키는 출발선일 것이다. 그 서정성은 붓의 움직임과 두터운 물빛으로 그만의 독창적인 민중미학의 가치이다.
이렇게 바위와 폭포의 연작은 대형화면에 단순한 이미지로 대상의 본질에 집중시키고 있다. 즉, 역사의 울림과 민의의 외침이라는 추상적 주제를 시각화 시키는데 있어 회화적 깊이와 함께 물빛의 서정성을 담아내고 있어 더욱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 온다.
▶송필용(1959·전남고흥)
▶전남대학교 미술교육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졸업
▶개인전 20회(광주, 서울)
2020 영감중국-그림 너머 그림(예술의 전당, 서울), 직시, 역사와 대면하다(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화창조원, 광주), 2018 천년의 하늘, 천년의 땅 (광주시립미술관, 광주), 2017 미황사(학고재갤러리, 서울), 2014 이응노, 대나무 치는 사람(이응노의 집, 이응노생가기념관, 홍성), 2013 오월, 1980년대 광주민중미술(광주시립미술관, 광주), 2012 평화의 바다-물위의 경계(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03 진경 그 새로운 제안(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99 몽유금강-그림으로보는 금강산300년(일민미술관, 서울), 1994 민중미술15년전(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소장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일민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청와대, 겸재정선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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