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9월26일 저녁 9시쯤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사건기자 중 막내로 A경찰서를 맡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평소처럼 경찰서 기자실에서 다음날 써야할 기사를 검토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내가 졌다.”“네? 누구시죠?”“B경찰서 과장인데, 실종된 자동차 영업사원 시신이 발견됐고, 가족이 확인했다. 다른 용의자를 체포했는데 자백했다. 내가 졌다.”이게 뭔 소리? 자신들(경찰)이 99% 범인이 확실하다고 큰소리 쳤던 용의자가 결국 범인이 아니라는 소린데…. 경찰이 살인범이라 확신했던 용의자는 살인범이 아니었고, 다른 진범이 나타났다.

지난 5개월여 동안의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광주매일 4월30일자 사회면에 1단으로 ‘30대 회사원 사흘째 행방불명’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30대 자동차 영업사원이 4월26일 새벽까지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택시로 귀가했는데, 사흘째 소식이 없다는 것이다. 경찰은 곧바로 수사에 착수했다.

당시 나는 A경찰서 담당이었고, 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B경찰서는 박헌주 선배 담당이었다. 나와는 관련이 없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박헌주 선배가 기자협회 축구대회 도중 무릎을 다쳐 병원에 입원하면서 B경찰서 사건도 거들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실종자 부인이라는 사람이 경찰서 기자실과 회사 등으로 찾아왔다. 부인의 이야기는“남편 실종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이 용의자를 체포했는데, 범인이 아닌 것 같다”는 것. 처음에는 황당했다. 다른 언론사의 기자들도 모두 믿지 않았고, 경찰도 어이없어 했다.

한편으론 좀 이상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실종자의 가족, 그것도 부인이 경찰과 상반된 주장을 한다는 사실이…. 무슨 촉이 발동했는지 박헌주 선배가 실종자 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것은 5개월 여정의 시작이 되었다.

박 선배는 부인으로부터 들은 내용을 나와 공유하며 공동취재를 제안했다. 나도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부인의 이야기에 신뢰가 갔다. 결정적 계기는 용의자로 체포된 택시기사의 부인으로부터 “경찰이 허위자백을 하라며 협박했다”는 증언이었다. 광주매일은 내부 논의를 거친 뒤 경찰 수사가 잘못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을 기사화하기로 결정했다.

5월14일, ‘살인은 자백, 유기 장소는 횡설수설’ 기사에 이어 6월6일, ‘범행 자백 강요 부인 구타, 경찰 가혹수사 파문’이라는 기사가 나갔다. 경찰은 펄쩍 뛰었다.

취재는 계속됐다.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용의자도 면회했고, 용의자의 집도 방문했다. 매일 이 사건에만 매달렸다.

광주매일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수사방향은 바뀌지 않았다. 8월3일 이 사건과 관련한 특집기사를 실었다. “99% 범인이 확실하다”는 경찰 관계자 인터뷰와 “용의자를 단정하지 말고, 다각적인 수사를 해 달라”는 실종자 부인의 인터뷰도 게재했다.

실종자 부인은 청와대와 감사원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서울 방송국 등도 찾아다니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럼에도 경찰의 수사방향은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들이 지목한 용의자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이런 아집 때문에 경찰이 억울한 시민을 살인범으로 몰았다는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당시 이 사건은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큰 이슈였다. 덕분에 고작 2년차 기자였던 나는 광주매일은 물론 지역 언론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특히 그 해 처음으로 제정된 국제엠네스티 언론상 제1회 수상자에 이름을 올리면서 기자로서는 물론 인생 전체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다.

나에게는 잊지 못할 순간이자, 영광스러운 1997년이었지만 광주매일은 97년을 전후로 큰 변화를 맞게 된다.

1997년 12월3일 IMF구제금융 신청으로 대한민국은 엄청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언론, 특히 지역 언론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더 혹독했다. IMF 사태 이전까지는 지역 언론도 나름 괜찮았다. 급여도 많은 수준이었고, 상여금도 600%에 달했다. 그러나 IMF이후 상여금은 모두 사라졌고, 급여마저 반토막이 났다. 여기에 많은 동료를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도 겪었다.

1995년 9월18일 광주매일 4기로 입사했다. 당시 광남일보가 창간하면서 많은 이동이 발생했다. 보통 신문사별로 매년 2-3명에 불과하던 기자 채용이 8명으로 늘면서 가까스로 꿈에 그리던 기자가 되었다.

당시 편집국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편집기자 수만 20여명에 달했다. 교열을 담당하던 기자도 10여명이나 있었다. (익산지방국토관리청 홍보담당으로 있으면서 청장을 모시고 언론사를 방문하면서 예전에 편집국 인원이 100여명이었다고 말하면 믿지 않는다. 사실인데 말이다.)

인원도 많았지만 그 때는 기자들이 기자로서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나름대로의 시스템도 마련돼 있었다. 젊은 기자들은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좋은 기사 쓰기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작은 기사 하나에도 신문사별로 자존심을 건 선의의 경쟁이 펼쳐졌다.

급여나 인원 등이 여유가 있어서 그랬는지, 늘 챙겨주고, 격려해주는 선배들이 있었다. 그런 분위기와 환경에서 기자생활을 할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그리고 그 행운이 엠네스티 언론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당시 선배들은 내가 그 사건에만 매달릴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경찰이 다양한 방법으로 “기사 좀 그만 쓰라”며 문제를 제기했지만 나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나는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취재하고, 기사만 쓰면 됐다.

1997년 이후 내 가슴에는 늘 엠네스티 언론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엠네스티 언론상에 부끄럽지 않은 기자가 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목표였다.

2010년 6월 광주매일을 떠나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쉽지 않은 공직의 길이었지만 광주매일 기자 출신이라는 자신감, 엠네스티 언론상 수상자라는 자긍심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과 자긍심은 지금도 계속 마음속에 남아 나를 올바른 길로 안내해주는 나침반이 되고 있다.

30주년을 맞는 광주매일신문을 바라보면서 1997년과 엠네스티 언론상이라는 추억을 소환했다. 1997년 이후 나의 기자생활은 1997년 이전의 기억 때문에 힘들었다. 그러나 그 기억 때문에, 늘 그 멋진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자생활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광주매일신문은 2001년의 아픔을 딛고 일어섰다. 2010년에도 위기가 있었지만 이겨내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는 광주매일신문이 겪은 2001년과 2010년의 아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늘 마음의 빚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바라고 싶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뛰었던 젊은 기자들, 후배들이 마음껏 기자 짓을 할 수 있도록 마당을 깔아줬던 멋진 선배들…. 1997년 이전 그때처럼 광주매일신문이 다시 활활 타오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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