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현들은 청명(淸明) 한식(寒食)이라고 했다. 청명은 24절의 하나로 4월5일경에 들며, 한식은 24절기에는 들지 않지만 청명 다음날인 4월6일경에 드는 명절의 하나다. 한식은 설날·단오·추석과 함께 4대 명절의 하나로 여겼고, 동지로부터 105일째 든다. ‘음력 2월 한식에는 꽃이 피지 않고, 3월 한식에는 꽃이 핀다’고 했다. 한식날 봄바람이 땅을 깎으며 외친데. 평평한 들의 제비와 참새들은 깃과 털이 높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寒食松溪途中(한식송계도중) / 오봉 이호민

한식 날 봄바람 땅 깎으며 외치는데
평평한 들의 제비와 참새 깃털 높고
늙은 학 깨끗하여라 파도 소리 꿈꾸며.
寒食東風剗地號 平郊燕雀羽毛高
한식동풍잔지호 평교연작우모고
千秋老鶴霜衣潔 獨立巖㟼夢海濤
천추로학상의결 독립암오몽해도

천년을 산 늙은 학 서리처럼 흰 옷이 깨끗하구나(寒食松溪途中)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1553-1634)으로 조선의 공신이다. 1584년(선조 17) 문과에 급제, 응교·전한을 거쳐 집의로 1592년 임진왜란 때 용만(의주)까지 왕을 모셨으며, 랴오양(遼陽)에 가 이여송에게 구원을 청해 평양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부제학, 예서판서를 역임했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한식날 봄바람이 땅을 깎으며 외친데 / 평평한 들의 제비와 참새들은 깃과 털이 높네 // 천년을 산 늙은 학 서리처럼 흰 옷이 깨끗하구나 / 바위 위에 홀로 서서 바다의 파도 소리를 꿈꾼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한식날 소나무 시내 길을 걸으면서’로 번역된다. 봄이 되면서 긴 동면에 들어갔던 벌레들이 기지개를 켠다. 눈 속에 파묻혀서 꼼짝도 하지 않고 벌벌 떨던 겨우살이들도 제법 기지개를 켜면서 제 활동을 시작한다. 텃새인 참새와 철새인 제비와 학들도 제 세상을 만났다고 온 세상을 선회하는 모양새를 갖춘다. 만상이 기지개를 켜는 형상이다.

시인의 시상은 자연의 깊은 높은 곳에서 가져오지 않고 가장 이상적인 어느 평범한 속에서 찾아내려고 했음을 보인다. 한식날 봄바람이 땅을 깎으며 부르짖듯 외치는데, 평평한 들판의 제비와 참새들은 깃과 털이 높다고 했다. 봄바람이 땅을 깎는다는 것이나, 철새와 텃새들의 깃이 높다는 시어들은 흔히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자는 선경에서 멋진 시어를 구상하더니만, 한 차원 높은 학의 관찰과 물씬 익은 시심 앞에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천년을 살아 온 늙은 학의 서리처럼 흰 옷이 깨끗한데, 바위 위에 홀로 서서 바다의 파도 소리를 꿈꾼다고 했다. 흰 색깔을 하고 있는 학이 흰 옷을 입고 바다의 파도 소리를 꿈꾼다는 시상은 바람직한 착상이다.

※한자와 어구
寒食: 한식날. 東風: 봄바람. 剗地號: 땅을 깎으면 외친다. 平郊: 평평한 들. 燕雀: 속 좁은 보통 사람의 비유, 다음 구에 나오는 [老鶴]과 대조. 羽毛高: 깃과 털을 높이 세운다. // 千秋: 천년. 老鶴: 늙은 학. 霜衣潔: 서리 옷이 깨끗하다. 獨立: 독립. 홀로. 巖㟼 : 바위 위. 夢海濤: 바다와 파도의 꿈을 꾼다. <시조시인·문학평론가(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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