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05(화)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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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후반까지 꽤 괜찮은 직업 배우로 지내던 필자는 30대부터 불행한 일들이 겹겹이 쌓여 순서도 없이 앞다퉈 찾아오고 있었다.
불행은 너무도 순식간에 나를 포위해 버려서 이것들이 나에게 어떤 해를 입히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나를 관통하는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하며 버티려고 애썼지만, 결국 마음에 병이 생겨 버렸다.
그냥 그렇게 나를 놓아버려도 되지 않을까라는 극단적인 생각이 들 때 즈음 아이러니하게도 살고자 하는 욕망도 함께 끓어올랐다.
결국 살아내고자 하는 마음이 극단적인 생각을 짓누르고 삶을 버틸 방법을 알아내라고 스스로를 재촉하게 됐다.
그때 불현듯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소 독서를 즐기지 않았기에, 해보지 않은 것을 시도해야만 그것이 나를 자극하고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동력이 될 거 같았다.
가장 절실한 순간에 발휘된 기지가 왜 책인지는 아직도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책 읽기는 내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나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매일 서너 권씩 책을 읽게 됐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에 빠져들었을 때, ‘글쓰기’라는 또 다른 출구가 나를 찾아오고 있었다.
독서가 겨우 숨을 쉬게 해줬다면, 글쓰기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적극적인 몸부림이었다.
필자는 친분이 있는 공연 잡지에 부탁해 글과 그림이 있는 공연 에세이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원고료를 받아 글을 쓰는 일은 처음이었다.
적은 금액이었지만, 원고료를 받는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책임감을 부여하고, 독서와 글쓰기를 끝까지 이어나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이었다.
처음 지면에 소개가 되는 공연 에세이의 글을 위해서 수많은 공연을 관람했다.
어떤 작품을 주제로 글을 써야 할지 고민하며 핸드폰 메모장에 글을 써 내려갔지만, 제대로 된 글이 나오지 않아 조급한 마음이 커지고 있었다.
마감일이 다가오면서 포기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 ‘푸르른 날에’라는 연극을 관람하게 됐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시대를 뒤흔든 소용돌이에 휘말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매우 현실적이고 극적으로 표현했다.
평범한 하루를 사는 사람들의 일상이 송두리째 바뀌는 것을 보면서 나에게 주어진 어제와 같은 하루가 당연하고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오랫동안 억눌렸던 감정이 터져 나오듯 눈물이 왈칵 쏟아져 버렸다.
그건 마치 긴 세월동안 간직하고 있던 그런 종류의 기억 같았다.
연극을 보는 내내 콧물을 훌쩍이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필자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기념하는 날에서 정확히 1년 하루 뒤에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더욱 나의 일상이 그날의 광주 시민들의 일상과 겹쳐보였다.
드디어 잡지사에 보낼 첫 글의 주제가 정해졌다.
2014년 7월에 첫 원고를 잡지사에 넘겨주면서도 내가 지금까지 계속 글을 쓰고 책까지 출간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10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볕이 여름을 재촉하는 6월에 광주 시민들을 만나러 무등에 갔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광주 시민들은 44년 전에 일어난 일을 또렷하게 이야기했다.
인문학과 축제, 무등이 어우러진 그곳에서 수많은 말과 말이 오가고, 갈무리가 될 즈음, 나는 글을 쓰게 된 ‘시작’에 대해서 수줍게 고백했다.
괜히 울컥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꾹 참고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때 미처 이야기하지 못한 고마움을 내가 처음으로 썼던 글의 마지막 구절로 대신 전하려 한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사람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981년 5월 19일 서울, 나는 아무런 대가 없이 나의 당연한 하루를 시작한다.’
나에게 주어진 당연한 평온한 하루, 오늘도 푸르른 날이다. 참 보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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