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기 광주교대 교수

30년 후 미래의 나를 만났다. 구순을 바라볼 때까지만 해도 입으로는 얼른 죽고 싶다고 했지만, 건강하게 살다가 한 사나흘 아프고 잠자던 중에 꿈길처럼 떠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지. 구순을 넘고 나니 맛있는 것도, 재미있는 것도 모두 사라져 그만 살고 싶다. 오는 것이 내 뜻이 아니었듯, 가는 것도 내 뜻이 아님을 알기에 부르면 언제든 떠날 수 있게 채비만 해두었다. 수의도 마련하고 장례비도 저금해놓고 아이들에게 남길 유언도 써 두었다. 열네 식구까지 살던 큰 집에서 혼자 지내며 앞뒤 마당 텃밭 농사지어 자식들에게 보내는 것을 낙으로 삼았지.

내가 걷지 못하면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아이의 말을 명심하며 싫고 힘들어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저녁으로 동네를 두 바퀴씩 돌았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작스럽게 몸이 멈춰 섰어. 아이 친구인 의사가 내 자율신경계가 망가졌다고 했다. 그리되니 아이의 말대로 아무도 나를 원치 않았다.

천정만 바라보며 요양원에 누워 지낸 지 어언 1년 반이 흘렀다. 처음에는 정신이 혼미하여 잘 몰랐으나 정신이 어느 정도 또렷해지니 사는 것이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졌다. 한 번 가면 죽어야 나온다는 요양원에 나를 버리고 간 자식들이 야속했다. 평생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 끝이 이것인가 하는 생각에 모든 것이 쓸데없다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았다. 어느 날 아이가 손을 잡으며 따스하게 한 마디 건넸다. “생의 마지막에 쓸 데 있는 것이 뭐가 있겠어요. 힘들게 살아왔지만 돌아보면 재미있던 날들도 있었지요? 자식 농사도 잘 지으셨지요. 남면 사람 중에서 처음으로 미국 여행 다녀오시고, 팔도강산 안 가본 곳 없이 자식과 함께 여행도 많이 다니셨잖아요.” “그래, 맞아. 튤립이 예쁘게 피어있던 미국 백악관, 큰 다람쥐가 다가와 음식을 달라던 나이아가라 폭포 공원과 폭포에서 탔던 배, 미국 공원에서 구워 먹던 맛있는 불고기 모두 생각난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그 장면이 나오면 어제 일인 양 기억이 또렷했지. 눈 내리던 날 설악산에서 네 아버지와 함께 탔던 케이블카도 기억나.”

어느 날 걸어볼 요량으로 요양사들에게 도움을 부탁했는데 아예 일어설 수가 없어서 포기했다. 행여 낙상할까 봐 자꾸 나가고자 하는 나를 한동안 묶어놓기까지 했다. 계속 누워만 있다가 보니 엉덩이 근육이 사라져 이제는 앉아 있는 것도 힘들다.

하나 있던 동생도, 함께 살아왔던 마을 친구들도 모두 떠나고 이젠 홀로 남았다. 무학에 한이 맺혀 시작했던 글공부도, 늘 끼고 지내던 텔레비전도, 그리 좋아하던 노래도 모두 싫어 보지도 듣지도 않은 채 침상에 하염없이 누워있다. 눈을 뜨면 어지러워 아예 눈을 감고 지낸다.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것 같다.

내 아이들이 찾아오길 기다리는 것이 삶의 유일한 희망이다. 어제는 아이에게 웃으며 이야기해 주었다. “한 세상 참 재미나게 살았다. 고맙다.” 아이도 말을 건넸다. “가시면 그리도 그리워하시던 외할머니가 활짝 웃으며 반기실 거예요. 저희도 곧 따라갈게요. 마음 편히 잡수세요.” 백발의 아이가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니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미래의 너는 멀리 있는 게 아니란다. 네 곁에서 너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어. 그를 만나 함께 하며 추억을 나누는 시간들을 아까워하지 말렴. 그리하면 오늘 이 순간을 감사하게 될 거야. 물론 미래의 너도 더 행복해질 것이다.”

이제 어머니가 떠날 채비를 하시는 것 같다. 요양원에 누워 계시는 어머니를 뵈러 가는 날은 30년 후의 나를 만나러 가는 날이다. 돌아올 때면 생각한다. 어찌하면 미래의 내가 마지막 순간까지 보람을 느끼고, 모두에게 감사하며 살아가게 할 수 있을까? 어찌하면 생의 마지막에 후회를 조금이라도 덜 하게 할 수 있을까? 어머니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 걱정이시다.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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