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기 전남대 명예교수

전례 없는 사상 최악의 산불재난이 가까스로 잡혔다. 누군가의 단순한 부주의로 시작됐다고는 하지만 국가적인 총력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오지 않는 봄비를 마냥 기다려야만 했던 안타까운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많은 사망자와 함께 온 마을과 농작물까지 집어삼킨 화마의 폐허를 둘러보며 삶터를 잃은 이재민들은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문득 지난해 국내의 한 중소 해운업체에서 사원들에게 추석 선물로 나눠줘 화제가 된 바 있었던 ‘생존가방’이 떠오른다. 조금은 의외의 선물이라는 평가도 있긴 했지만, 상존하는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과 장기화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등의 국내외 정세와 흐름을 고려할 때, 우리네 국민들도 이젠 비상시를 고려한 물품들이 담겨있는 생존가방 하나씩은 가질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결국 사원들의 재난안전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회사 배려 차원의 선물로 인식되었음직하다.

더구나 그동안의 장기적인 경제침체, 코로나19 팬데믹, 그리고 최근 WTO체제 붕괴 등 예기치 못한 일련의 돌발상황들을 겪어오면서 언제든 누구에게나 의외의 재난이 닥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이 커 온 터이다. 그래서 미리 개인 차원의 재난준비에 대한 조바심과 호기심이 새로운 시대적인 흐름이 되고 있다. 이처럼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재난상황에 대비해서 미리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들을 일컬어 프레퍼(Prepper)라고 한다.

미국의 돈많은 프레퍼들은 재난시에 대피할 지하벙커에 물고기 양식장, 채소재배기, 잔디공원, 컴퓨터실, 영화관 등의 편의시설까지 갖추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2017년 이후 프레퍼족의 수가 2천만 명을 넘어서고 있으며, 벙커에 대한 수요도 2020년 팬데믹 이후 3배 이상 늘었다는 통계도 보도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프레퍼들은 몇 달 치 분량의 음식을 동결·건조해 구비해 두거나 제빵, 정육 등 기본적인 생존 레시피와 도구들을 비치하기도 한다. 이러한 추세를 반영해 최근 아마존이나 코스트코 등의 대형마트에서도 프레퍼족을 위한 비상식량이 판매되기 시작했다.

프레퍼들의 이야기가 아직은 대부분 외국의 사례이기도하고 새로운 재난대응 추세치고는 ‘유난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더구나 프레퍼들의 이러한 행동은 기본적으로 국가나 정부의 재난대응시스템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공동의 선을 위한 대책보다는 주로 개개인의 경제력 차이에 따라서 준비내용이나 방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또한 국가에서 선제적으로 수행할 책무가 있는 재난대응문제를 결국 개개인에게 전가하는 꼴이어서 정책적으로 장려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국내에서도 프레퍼에 대한 인터넷 조회나 블로그가 늘고 있는 추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번의 전례없는 산불재난과 이재민들의 생활상 보도가 기폭제가 됐으리라고 보지만, 주변국들의 전쟁과 정치적 이해관계, 이로 인한 경기침체와 물가상승 보도 등이 큰 위기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최근 장기화되고 있는 탄핵정국과 민생보다는 정쟁으로 점철되고 있는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오히려 더 큰 재난위기로 인식돼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부디 개인 차원의 프레퍼가 아닌 국가와 정부 차원의 프레퍼로 신뢰받는 사회가 빨리 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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