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4(금) 11:18
|
5·18민주화운동 최초의 시선집 문병란·이영진 시인 편 ‘누가 그대 큰 이름 지우랴’(도서출판 인동, 1987)를 번역·편집해 한글과 일본어로 출판한 ‘5월 광주항쟁의 저항시’도 그 중 하나다.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와 사가와 아키 시인이 공동 작업한 결과물이다.
이 책은 일본 헌법 9조를 수호하는 모임 문예지 ‘시의 윤통신’과 한일 기본조약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일본 지식인들의 기자회견 석상에 소개된 데 이어 이케다 이사오(池田功) 일본 메이지대학 대학원 교수(교양디자인연구과)가 시전문지 ‘시와 사상’ 3월호에 ‘5월 광주항쟁의 저항시’에 대해 서평을 게재한 바 있다.
이 가운데 5·18민주화운동 45주년을 맞는 오는 5월18일 시선집 원본의 편저자인 문병란 시인과 일본의 양심 작가 마쓰다 도키코의 저항정신을 비교하는 연구 발표를 축으로 인권·평화·저항의 의미를 공유하는 국제심포지엄이 열릴 예정이다. 또한 행사 참가자들과 심포지엄 여행단을 꾸린 외국인 답사객들이 함께 국립5·18민주묘지에 자리한 문병란 시인 묘지를 참배하는 시간도 갖는다.
이러한 분위기 속 최근 ‘5월 광주항쟁의 저항시’ 서평을 게재한 이케다 교수가 김정훈 교수를 통해 5·18민주화운동 성지인 광주 망월동 묘역을 방문한 기억을 살려 특별기고문을 보내왔다. (편집자 주)
‘시와 사상’으로부터 문병란·이영진 편, 김정훈·사가와 아키 번역 ‘한일 대역 5월 광주항쟁의 저항시’(사이류샤)에 대한 서평 의뢰가 있었다. 37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책에는 50명 넘는 시인들 작품이 실려 있었다.
이 책은 1980년 5월 군사정권에 맞서 다수의 희생자, 부상자가 발생한 민중봉기를 주제로 한 작품집의 번역이다. 이 책에 대한 서평에 대해서는 이미 ‘시와 사상’(토요미술사출판판매)에 실렸고 ‘교수신문’에도 번역, 게재된 바 있다. 마지막으로 조금 덧붙이고자 한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나는 아직 학생이었다. 일본에도 광주에서 큰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도되었고 그 항의운동이 일어난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기억이 옅어졌다고 말하는 게 바른 표현일 것 같다.
그런데 그 후 이 사건이 나와 인연이 닿아 있다고 느낀 적이 있다. 개인적인 일이어서 쑥스러운데, 나는 1988년 4월부터 한국의 대학에서 2년간 일어일문학 초청 특별 전임강사로 근무했다. 1989년 7월에는 여름방학을 이용해 광주시를 견학할 기회를 얻었다.
안내역을 맡은 이는 전남대학교 출신의 S 씨였다. 그는 만나자마자 곧장 “묘역으로 갑시다”라고 했다. 실은 그때 그 의미를 난 금방 이해하지 못했다.
시내에서 교외를 자동차로 4-5㎞ 달려 고즈넉한 산속으로 들어섰다. 언덕을 오르자 갑자기 눈앞에 무수히 땅 위에 쌓인 작은 무덤들이 보였다. 이게 도대체 누구의 묘일까 하고 생각했다. 거기에 학생으로 보이는 단체가 묘를 참배하고 있었다.
작은 묘 앞에는 개인 사진이나 꽃다발, 술 등이 놓여 있었다. 묘석에는 기일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을 본 순간 까무러치게 놀랐다. 거의 모든 분의 기일이 1980년 5월로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겨우 나는 이 장소가 그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분들의 묘역임을 알았다.
S 씨가 조용히 설명해줬다. 여기가 망월동 묘지라고, 사진에는 임신 중 살해된 여성에서부터 아직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사내아이, 20세 전후의 학생, 노동자들의 생전 사진이 걸려 있었다. 젊은 나이에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가 된 사람들이 내 발밑에서 잠들어 있었던 게다.
유족회가 제작한 사진집과 팸플릿도 판매하고 있었다. 그 책을 사서 펼치자, 총에 뚫린 사체와 불에 타서 그을린 사체의 컬러사진이 수십 장이나 실려 있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한 지 10년이 지나지 않은 때였는데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그 망월동 묘지에서 소름 끼칠 정도로 느낄 수 있었다.
산에서 내려와 S씨와 전남도청 앞을 거닐었다. “이 도청 앞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됐어요”라고 S 씨는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10년 후엔 당시의 장소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활기차고 밝은 시내로 바뀌어 있었다. 이 망월동 묘지를 방문한 기억을 귀국 후 졸저 ‘젊은 일본문학 연구자의 한국’(무사시노쇼보, 1992년)에 수록한 적이 있다.
그 후 광주민주화운동을 영화로 보게 되었다. ‘택시운전사―약속은 바다를 넘어’(한국에서 2017년 개봉. 일본에서는 다음 해 상영)였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도청 앞을 거닐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 ‘소년이 온다’(한국에선 2014년 간행, 일본에선 2016년 간행. 이데 슌사쿠 번역, 쿠온)를 읽을 때 그 비참함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군에 희생된 15세 소년 동호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동호는 함께 데모행렬에 참가한 친구를 구하지 못한 일로 자책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알았음에도 피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 소설의 곳곳에 사건 희생자들에 대한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묘사가 펼쳐져 있어서 읽기가 고통스러웠다. 마지막이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이다. 작가는 20세 때의 겨울 처음으로 혼자서 동호의 묘를 찾아 망월동에 간 기억을 서술했다.
“한참 걷다가 오른손이 여태 가슴 왼편에 얹혀 있었던 걸 깨달았다. 심장 언저리에 금이 벌어진 것처럼. 그렇게 해야 무사하게 운반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된 것처럼”이라고 그때의 충격을 새겨 넣었다.
내가 방문했던 1989년에 처음으로 들어선 묘지였는데, 1997년 정부가 ‘국립 5·18민주묘지’를 조성해 묘도 이장됐다. 그 당시 유족이 관을 개봉해 확인할 때의 묘사가 에필로그에 등장한다.
“처참했던 모습 그대로인 겁니다. 유골에 비닐이 친친 둘러져 있고, 피묻은 태극기가 덮이고…”라고 묘사되며 동호의 형은 “뼈 한마디 한마디를 직접 닦았”지만, 그것을 본 어머니는 충격으로 “이상해졌다”라고 씌어 있다. 살아남은 유족들이 그 후에도 계속 비참한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상이 드러나 있다.
이젠 (‘5월 광주항쟁의 저항시’에 대해) 쓴 서평으로 돌아오는데, 마지막 부분에 “많은 작품에서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투쟁하다가 희생된 사람들을 잊을 수 없고, 시대의 부조리를 인식할 때 투쟁해야 한다는 강한 결의를 다지게 된다”라고 서술했다. 이는 우리 일본인에게도 중요한 사항이다.
● 이케다 이사오 교수 약력
메이지대학교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동국대학교 초청 특별 전임강사, 독일 프라이 부르크대학교, 본대학교 일본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인도 델리대학교 대학원 객원교수, 국제 이시카와 다쿠보쿠 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메이지대학 대학원 교양디자인연구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일본문학 연구자의 한국’, ‘이시카와 다쿠보쿠 국제성을 향한 시좌’, ‘다쿠보쿠의 편지를 읽는다’ 등이 있다.
▶ 디지털 뉴스 콘텐츠 이용규칙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