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의 응시로 급제하다
광주광역시 남구 건지산 자락에 영사정(永思亭)이란 정자가 있었다.

이 정자는 음풍농월하는 여느 정자와는 달랐다. 평생토록 부모님을 기리고 사모하기 위해 세워진 정자였기 때문이다. 허백당 성현이 그의 큰 뜻에 감동해 ‘영사정기’(永思亭記)를 지어 그 효를 칭찬했다. 그 영사정의 주인공이 연산군의 폭정에 맞서 간언하다 죽임을 당한 영사정 최형한(崔亨漢, ?-1504)이다.

영사정 최형한의 묘소(광주시 남구 양과동)와 묘갈명

최형한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진사가 되고 3년 만인 20대 초 중반에 과거에 급제한 것을 보면, 대단히 총명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진사가 된 것은 1480년(성종 11)이었고, 3년 뒤인 1483년(성종 14) 창경궁 춘당대(春塘臺)에서 실시한 특별 과거인 춘당대시에 을과 1등으로 합격한다. 을과 1등은 33명의 합격자 중 4등에 해당되는 뛰어난 성적이다.

최형한이 언제 태어났는지도 알지 못한다. 단지, 1450년대 후반으로 추정될 뿐이다. 이는 최형한이 옥과현감으로 부임 시 서울 동문밖에 술자리를 만들어 최형한을 보내면서 ‘송최옥과서’(送崔玉果序)를 지었던 탁영 김일손이 “나의 벗 최탁경씨는 호남인이다”라는 기록에서 추정된 연도일 뿐이다. 탁영 김일손이 최형한을 ‘나의 벗’이라고 쓰면서도 ‘최탁경씨’라고 존칭을 쓰고 있다. 김일손이 1460년생이니 최형한의 출생 연도는 1450년대 후반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최형한이 1450년대 후반에 출생했다면, 과거 급제시 나이는 20대 초·중반에 해당된다. 조선시대 평균 과거 합격자의 나이가 30대 중·후반임을 고려하면 그의 과거 급제는 매우 빨랐다.

그가 젊은 나이에 급제했음은 ‘영사정실기’ 서(序)에 ‘젊은 나이에 등과하여’나 ‘송최옥과서’의 ‘문학이 넉넉하고 문장이 뛰어나 한 번의 응시에 급제하고’라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모범 수령(목민관)으로 선발되다
춘당대시 을과 1등에 합격한 그의 첫 관직은 정9품직인 전교서 정자였다. 그러나 첫 관직 생활은 큰 병으로 1년 만에 끝이 난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대에 “전교서 정자 최형한은 본래 가난한 선비로서 서울에 와서 있는데, 이제 큰 병을 얻어 거의 사경에 이르렀습니다. 청컨대 치료해 주게 하소서”라는 기록도 보인다. 이에 성종은 약과 음식을 내린다. 과거 합격 1년 만에 사직하고 낙향한 이유다.

낙향 1년 후인 1485년(성종 16), 연이어 두 어버이를 잃는다. 그는 건지산 자락의 부모님 무덤 옆에 영사정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면서 추모의 정을 달래었다.

그가 다시 중앙 정계로 진출한 것은 1489년(성종 20)이었다. 최형한은 정6품직인 사헌부 소속의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발탁됐고, 그해 서장관이 되어 연경(북경)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옥과현감, 영암군수를 거쳐 사간원 헌납, 사헌부 장령을 지낸다. 최형한의 외직은 옥과현감과 영암군수가 전부다. 짧은 외직이었지만 최형한은 직분에 충실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는지는 ‘조선왕조실록’(연산 9년 7월조)의 “각도 감사가 계문(啓聞)한 수령의 포장 여부를 정승들에게 의논하게 하니…지금 각도 감사의 계문한 것을 보면 전주부윤 김선, 영암군수 최형한, 충주목사 최인, 청주목사 윤장은 공정하고 청렴하며, 부지런하고 조심하여 백성들의 생업에 안정된 것을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니, 상을 주더라도 좋으나….”라는 사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위 사료는 연산군 9년에 각도의 관찰사(감사)에게 백성의 생업을 안정시킨 수령을 추천케 해 포상하는 내용인데, 당시 영암군수였던 최형한이 전주부윤이었던 김선과 함께 포상받고 있다. 최형한은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던 성실한 목민관이었다.

최형한은 영암군수 직전 사헌부 장령이었다. 사헌부는 지금의 감사원 혹은 검찰 기능을 수행한 관청으로 관리들의 규찰(糾察) 및 탄핵을 담당하는 중앙의 핵심부서였다.

장령 시절 그는 연산군에게 내수사의 장리(長利)와 위차(委差)에게 말을 내준 것의 부당함을 8번에 걸쳐 연이어 직간했다. 그러나 최형한의 직간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리어 미운털이 박혀 영암군수로 좌천된다. 사헌부 장령은 정4품 관직이었고, 영암군수는 종4품 외관직이었다. 그럼에도 불평 없이 수령으로서의 직분을 다했고, 전라도 관찰사에 의해 모범 수령으로 천거되고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백성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실천이었다.

-성현, ‘영사정기’를 써주다
최형한의 호는 영사정이다. 최형한의 호가 ‘영원히 어버이를 사모한다’라는 뜻을 지닌 ‘영사‘(永思)는, 그가 지은 영사정이란 정자와 관련이 있다.

부모님 3년 상을 치른 후 서장관이 돼 북경에 다녀온 후 받은 관직은 외직인 옥과현감이었다. 그는 옥과현감으로 부임하기 직전 첫 관직인 전교서에서 인연을 맺은 성현을 찾아뵙고 영사정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 후 덕담을 청한다.

이에 성현은 다음과 같은 ‘영사정기’를 써 준다.

“내(성현)가 생각하건대 영사의 뜻이 크도다. 이는 ‘시경’에서 말하는 ‘길게 효심을 말하니, 효심이 법칙이다(永言孝思 孝思維則)’라고 한 말이다. 무릇 사람이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감촉된 바가 있는 것이다. 마음이 맡은 것을 생각하는 것이니 생각하면 반드시 그 성(性)을 다하는 것이며, 반드시 그 직분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다하는 것이다. 들어가면 어버이께 효도하는 바를 생각하고 나가면 임금께 충성하기를 생각하는 것이 그 마음은 한 가지다. 어버이는 자식에 대해 이끌어주고 사랑하여 못할 바가 없으니, 자식 된 자는 망극한 은혜를 생각하여 능히 갚지를 못한다면, 오직 나의 심력을 다하고 공경히 어버이의 뜻에 순종하며 어기지 말아야 한다.…이것이 정자를 지은 까닭이다. 생각을 길게 하기 때문에 효심이 쇠하지 않고, 효심이 쇠하지 않기 때문에 능히 그 직분을 다한 것이다.”

옥과현감으로 발령받아 떠나는 최형한이 성현에게 ‘돌아가신 두 부모님을 위해 영사정을 지어 어버이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다하였다’고 하면서, 외직으로 떠나는 자신에게 한마디 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성현은 ‘영사’(永思)라는 뜻이 매우 넓고 큰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위와 같이 설명하며 덕담을 건넨 것이다.

영사정은 최형한이 실천한 효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형한의 효는 충주인 박효덕의 지적대로 ‘시전’(詩傳)과 ‘서전’(書傳)에 나오는 훈계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지극한 효심이었다. 어버이 돌아가신 후 시묘살이했던 3년 만이 아닌, 죽을 때까지 어버이에 대한 사모의 정을 가슴속에 깊이 간직한 효심이었다. 오늘 우리가 영사정을 주목하고 그의 효를 칭찬하는 것은 평생토록 가슴속에 품고 살아간 어버이에 대한 뜨거운 사랑 때문일 것이다.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하다
그의 마지막 관직은 두 번째로 맡은 사헌부 장령이었다. 그런데 사헌부 장령은 그에게 커다란 시련이었다. 1504년(연산 10)은 갑자사화가 일어난 갑자년으로, 폐비 윤씨의 복위에 반대한 선비들은 처형되고 그 가족들까지 무차별 처벌됐다.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그는 관직을 내놓고 물러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임무를 회피하지 않았다. 올곧은 성품을 지닌 그는 연산군의 불의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무모한 폭정에 맞선다. 최형한의 충언에 연산군은 노했고, 궐문 밖으로 끌려나가 죽임을 당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기록이 참고된다. ‘영사정실기’ 권3, ‘성재신공집록’에는 “장령인 최형한의 본관은 경주요…연산이 황음(荒淫)하여 무도하거늘 공(최형한)이 이에 항의와 직간으로 대궐 문밖에 왕명을 기다리다가 드디어 자진하시다”라고 기록돼 있어, 자진한 것으로 돼 있다.

이에 반해 ‘영사정실기’ 권3, ‘구암최공경주최씨명현록’에는 “또 갑자(갑자사화)에 무고(誣告)하거늘 공이 장령 벼슬로 조정에 상소로 항의하고 직간하다가 가을 9월 정사(丁巳)일에 대궐 문밖에 끌려나가 죽으니…”라고 해서, 갑자사화의 무고에 맞서 항의하고 직간하다 대궐 문밖에 끌려나가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돼 있다.

‘영사정실기’ 권3, ‘야우장공실기’(野憂張公實記)에는 “연산조에 대간이 되어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조정에 상소하고 항의하여 간하다가 왕명을 대궐문에서 기다렸더니 향수(享壽)를 얻지 못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향수를 얻지 못하였다’는 서술은 죽임을 당했는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 명에 죽지 못했다는 것이다.

최형한의 죽음은 갑자사화가 일어난 갑자년 가을 9월 정사(丁巳)일이었다.

최형한은 연산군의 무도함과 폭정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직간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무오·갑자년의 사화와 관련된 연산군의 무도한 살육과 폭정이었음을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연산군의 무도한 살육과 폭정을 중지시키기 위한 최형한의 직간은 죽음을 담보한 것이었다. 몇 번 직간하고 항의해서 왕이 듣지 않으면, 신하는 물러나면 그만이다. 그러나 최형한은 관직에서 물러남으로 그 책임을 결코 회피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이 오늘 우리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올곧은 삶을 지켜내기 위해 바친 그의 의로운 죽음 때문일 것이다.

그의 죽음이 자진인지, 사약을 받고 죽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어떻게 죽었는지보다는 왜 죽었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1737년(영조13),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에 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지산영당’이 건립된다.

지산사 전경(광주시 남구 양과동)

지산사 유허비

지산사의 강당, 지산재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지산영당은 1846년(헌종 12), 최형한과 형 최운한, 정오도가 추가 배향되면서 이름이 지산사(芝山祠)로 바뀐다. 그런데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영당만 남고 훼철되고 만다. 오늘 지산사에는 최치원의 영정만 모시고 있다.

지산사 인근에는 영사정 최형한의 묘가 있고, 영사정 묘갈명(墓碣銘)과 묘갈추지(墓碣追識)도 곁에 있다. 또 곁에는 최형한이 두 어버이를 기렸던 시묘살이의 공간, 영사정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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