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5일(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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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해상실크로드의 중국 거점, 영파 (5)
수천년 이어 온 ‘쌀떡’…우리 음률 흐르는 ‘남조고악’

  • 입력날짜 : 2017. 12.26. 18:42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절강성의 사찰.
절강성의 항구 ‘영파’는 옛 한반도 인들의 주요 무역거점이었다. 이곳은 해류와 바람을 통해 우리나라와 직접 바닷길로 연결됐다. 때문에 예부터 왕래가 활발했던 곳 중 하나였다. 신라초·신라방·고려사관 등 신라 시대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때로는 고려의 지식인이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이곳 주민, 특히 주산군도의 주된 주민은 ‘비류 백제인’이란 설이 있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수천년을 이어 온 ‘쌀떡’, 지금껏 우리나라에서 연주되고 있는 남조고악 등이 그 증거가 되지 않을까 여겨진다. 또한 그래서 그런지 ‘장보고’와 ‘장지신’ 등 걸출한 해양인들이 활동했던 곳이기도 했다.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
▶옛 한반도인들의 거점 ‘영파’

고대에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무역항구는 산동의 등주항, 장수의 연운, 절강의 명주항, 복건의 천주항, 광동의 광주항, 그리고 고려의 예성항이었다. 절강의 명주항이 바로 영파다. 영파는 융강[甬江]과 위야오강[餘姚江]의 합류점에 있다. 역사적으로 왜구의 출몰이 잦아 방위기지를 두기도 했다. 당(唐)·송(宋) 시대 이후에는 명주(明州)라고 불렀다.

또한 영파는 중국 상인을 대표하는 ‘닝보방’[寧波幇]의 원류이다. 한반도의 개성상인과 같은 존재다. 당·송대부터 해상교역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만큼 상업적인 도시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와는 바닷길로 직접 연결됐다. 따라서 고대 한중무역의 주요 거점이었다. 또한 구법승(求法僧)들이 거쳐 가는 관문이기도 했다. ‘신라초’(新羅礁), ‘신라방’(新羅坊) 등 신라 시대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옛 기록을 보면, 신라인들이 서북풍이 부는 10-2월에 남중국으로 건너가서, 서남풍이 부는 3-8월에 신라로 돌아왔다고 돼 있다. 여주 고달사의 원종대사도 신라 진성왕 6년(892년) 초봄에 상선을 타고 중국 남부로 가서, 921년 7월에 진주로 돌아왔으며, 해주의 진철대사는 869년 영파로 가서, 911년 7월에 나주로 돌아왔다. 문경 봉암사의 정진대사도 900년에 상선을 타고 중국 남부로 갔다가, 924년 7월에 전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을 통해 금·은·나전칠기·화문석 등이 수출됐고, 비단·서적·도자기·약재 등이 수입됐다.

1117년 ‘고려사’(高麗司)를 설립해 사무를 맡게 하고 ‘고려사관’(高麗使館)을 설치해 사절들에게 편리를 제공했다. 아직도 고려사관 터가 남아 있다. 또한 고려 충선왕은 관음상에 참배하러 대도(북경)에서 보타산에 가기도 했다. 이때 이제현 등 많은 신하들이 왕을 수행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보타산은 고려시대에도 한·중 항로의 중요 좌표로서 구실을 다했던 것이다.

현재 새로이 고려사관을 조성해 한중교류의 의미를 다시금 살리고 있다. 또한 이곳에 표류해 영파를 거쳐 간 최부(崔溥·1454-1504)의 기념관이 함께 조성돼 있다.


옛 고려인들의 정신적인 안식처이자, 최고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는 보제사를 찾은 필자.
▶주산군도에 자리 잡은 ‘비류백제인’

주산군도와 보타도에 뿌리를 내린 해상세력은 고대 백제인이라고 한다. 그들은 보타도를 근거지로 삼고 한국과 중국, 일본을 왕래하며 삶을 영위했다. 우리는 그들을 ‘비류백제인’이라고 부른다. 부여의 왕자였던 비류와 온조가 남으로 오늘날 인천과 하남에 각각 자리 잡고 국가를 열었으나 온조에의해 비류가 망했고 그 잔존세력이 이곳 주산군도로 도망 와서 자리 잡았다는 설이 있다.

이들 비류백제 인들은 재당신라인, 재당고려인, 또 왜구로 이름을 바꿔가며 동아시아의 바다를 지배해왔다. 그들은 삶의 치열한 공간 속에서 몸부림치며 우리 전래의 풍습과 생활방식을 유지하면서 살아왔다. 가는 곳이 그 어디든 끈질긴 생명력으로 뿌리를 내리고 자손을 번창시키며 전통과 맥을 이으며 살아왔다. 이들은 화교란 이름으로 멀리 동남아 까지 진출했다. 동남아의 화교들의 마음의 고향이 주산군도와 보타도임을 알고서 그들의 먼 조상들이 한반도에서 출발했음을 알려준다. 그들이 생활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들의 ‘지명의 흔적’에서 백제의 담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도 한다.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신라방·신라소·신라촌·신라관·신라원 등의 의미를 곰곰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신라인의 거주지인 신라방과 신라촌, 신라인을 다스리는 신라소, 여관인 신라관, 절인 신라원이 만들어졌다. 장보고가 828년부터 846년까지 18년 동안 청해진 대사라는 특별 관직을 받고 해상왕국을 건설했다.

신라방·신라소가 가장 많은 곳은 주산군도 쪽이었다. 최치원이 언급했듯이 백제의 영향력이 미치던 지역이었다. 백제 유민들이었다. 동지나해에서의 가야·백제 유민들의 활약은 적어도 14세기 후반까지 계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명나라가 해적들을 소탕한 시기까지 이어졌다. 명의 주원장이 해적 소탕에 나서자 주산군도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특히 난수산도(수산도) 사람들은 반란이 실패하자 한반도로 도주해 고려인들 사이에 숨어 살았다. 이들의 외모가 한민족과 같았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걸출한 인물 ‘장보고와 장지신’ 배출

당시 이곳을 거점으로 활약한 재당 신라인 중에 장지신이란 인물이 있었다. 장보고보다도 더욱 크게 느껴지는 인물이다. 아니 장보고를 능가하는 인물이다. 그는 엔닌 일기를 비롯한 다양한 사료에 나온다. 그는 수차례나 한국과 일본을 왕래했다. 그는 항해뿐만 아니라 선박 건조술도 능했다. 명주항로의 베테랑이었다. 그는 3-4일 만에 주파했다고 한다.

장보고 또한 이곳 주산군도와 관계가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학자는 그가 이곳에서 출생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아시아 해양무역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엔닌 일기를 들여다보면, 무대만 당나라였지 마치 신라를 여행한 듯 기록된 인물의 대부분이 재당 신라인이다. 그만큼 당나라 시대에 재당 신라인의 활동상과 역사적 위상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재당 신라인들은 단순히 운송교역에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다. 숯이나, 소금과 같은 당시 부가가치가 높은 황금산업을 직접 생산하는 등 생산과 물류의 전반에 걸쳐 독자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오늘날에 비교하면 종합상사의 역할을 한 셈이다.


▶농경문화 원류 상징 기복문화 깃든 ‘쌀떡’

쌀떡은 이곳의 특산품이다. 중국전역과 화교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이다. 2천5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맛과 종류가 최고라고 한다. 달고 짜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동지에는 쌀떡(연고)를 주식으로 먹는다. 먹는 방법도 46가지나 되고, 만드는 종류는 더욱 많다. 대나무향이 배게 하고, 절구에 한 번 더 떡메로 치는데 수차례의 과정이 맛의 관건이다. 수천년의 경험이 맛을 낸다. 쌀로 만든 식품의 역사를 보니, 농경문화의 원류지 답다.

쌀떡을 만들 때 쓰는 ‘떡살’(연고판)을 쓴다. 떡살은 떡을 눌러 갖가지 무늬를 찍어 내는 판이다. 떡살은 ‘기복의 도안’이 음각돼 있어 예술적 가치를 갖는다. 福자와 壽자가 가장 많이 새겨져 기복신앙이 깃들어 있다. 두 글자 사이에는 거미가 그려져 있어 둘을 이어주는 우화적 도안이 재미있다. 이밖에 과거급제를 기원하는 의미가 새겨진 것도 많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534명의 과거시험 합격자가 배출됐다 한다. 그 중 5명은 장원으로 합격했다. 과거시험 보러 갈 때 그 내용이 새겨진 쌀떡을 휴대하고 고사에 임했다 한다. 부드럽고 찰지고 점착성이 있다. 찹쌀로 만든 것보다도 찰지다. 수집된 다양한 떡판이 진열돼 있다. 재미있는 유형이 많다. 우리의 떡판과 비슷하다.

이제 기계화되고 자동화돼 있다. 따라서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장이 많다. 세계로 팔려나가고 산업화로 점차 인기를 더하고 있다.

이곳의 떡살은 우리나라에까지 전해졌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통 단단한 박달나무·감나무·참나무 등으로 만들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기나 백자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떡살 무늬는 원형이나 긴 네모 등 여러 가지였다. 무늬는 기하학적인 무늬가 대부분이고, 나비 무늬나 새 무늬, 꽃무늬, 선무 늬가 음각이나 양각으로 떡 위에 새겨지게 했다. 떡을 적당한 크기로 썰어 표면에 참기름을 바르고 떡살로 누르면 무늬가 새겨진다. 단옷날의 수리취 절편에는 수레 무늬가 있는 떡살로 수레 무늬를 내고, 잔치에는 꽃 모양을 찍어 넣고, 사돈이나 친지에게 보내는 선물용에는 길한 무늬를 넣어 기름하게 만들기도 했다. 떡살은 떡을 먹음직스럽게 보이도록 하고, 좋은 운을 바라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고 한다. 또한 떡살의 무늬는 각 가정마다 고유한 모양을 만들어 사용했다.


▶비류 백제인과 ‘남조고악’

명동성당에서 연주되는 남조고악 중에 ‘미살’(尾煞)이라는 음악이 있다고 한다. 중국 남조 왕국은 대략 300년이 좀 안되는 27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보통 왕위는 선왕이 죽은 후에 이어받지만, 남조는 왕이 살아 있을 때 세자에게 왕권을 이양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왕은 은퇴를 하면 사찰로 들어가서 스스로 승려생활을 한다. 그리고 왕비들은 따로 ‘보타도’라는 섬으로 떠나서 수행을 하며 일생을 마쳤다.

‘미살’은 은퇴하는 황제를 뒤따르면서 부르는 노래다. 새로운 출발이면서 동시에 한 시대의 종막을 고하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음악은 슬픈 것이 아니라 매우 경쾌하다. 우리의 차차차와 비슷한 경쾌한 분위기로 길게 반복하면서, 성의 북문에서부터 남문, 그리고 외성문까지 걸어나가면서, 자진 은퇴하는 왕을 한편으로는 위로하고 그 종결을 찬양하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는 그런 음악이다.

이 음악이 비류 백제인과 연관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연구해 볼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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