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18일(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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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해상실크로드의 중국 거점, 영파 (6)
‘김구 선생 피난처’ 臨政 요인들 파란만장한 삶 간직한 ‘가흥’

  • 입력날짜 : 2018. 01.09. 18:55
김구 선생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잠시 머무르던 ‘매만가’.
절강성의 고대항구 영파! 옛 한반도 인들의 주요 무역거점이었다. 직접 바닷길로 연결돼 왕래가 잦았던 곳이다. 영파 항 주위에는 지금까지도 옛 선조들의 자취와 흔적이 남아 있고 향기가 배어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곳 주민들도 많은 수가 우리 선조란 설이 있다.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
▶고려와 교류가 활발했던 무역기지

고려는 절강성에 자리잡고 있던 ‘오월국’과 깊은 관계를 맺고자 했다. 태조 2년에 오월국에 김립기(金立奇)를 사신으로 보냈다. 이때 오월 출신의 추언규(酋彦規)가 고려에 귀순했다. 이후 오월국은 고려와 적극적인 교섭을 했다. 중국은 한 동안의 분열시대(分列時代)를 거친 후 결국 960년에 후주를 쓰러뜨리고 송나라가 건국됐다. 962년 광종은 송에 이흥우(李興祐)를 사신으로 파견하고 토산물을 선사했다. 그러자 963년에는 송의 태조가 시찬(時贊)을 중심으로 90여명의 사신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고려의 벽란도에는 아랍과 서역 상인들도 많이 왔다. 1024년 현종 때 대식국(이란) 상인이 100여명이 한꺼번에 온 적도 있었다. 이어 다음해인 1025년과 그 뒤 1040년에도 대거 왔다.

고려가요인 쌍화점(雙花店)에서 등장하는 ‘여인의 손목을 잡은 회회인(回回人)’은 서역 상인이었다. 이들은 주로 향료·물감·조미료 등을 가져왔다. 이 외에도 마팔국(인도), 삼라곡국(태국), 교지국(베트남) 등과도 교역했다.

이들 가운데는 고려인과 결혼하거나 정치에 참여해 구화한 사람도 꽤 있었다. 광종 때 과거제도를 도입한 쌍기가 대표적이다. 수도인 개성은 다양한 인종과 물건들이 모여드는 국제도시였다. 10여개의 객관(여관)이 있었고, 이곳에 머물면서 무역을 했다.

‘양직공도’에 나타난 백제 사신.
고려인들도 중국으로 부지런히 건너갔다. 중국 해안 여러 도시에는 고려인들 거주지가 형성돼 있었다. 그 가운데에도 영파는 특히 많이 살고 있었다. 시내 한복판인 ‘진명령’에 한인촌이 있었다. 고려는 몽골과 전쟁 중에도 교역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송나라 상인들은 염탐을 해 가기도 했다. 고려의 무역은 송이 망하고 원나라가 세워진 다음에도 지속됐다.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위해서 중국 절강성에서 쌀 20만석을 고려에 실어오기도 했다. 고려 상인들은 마포 등을 팔고, 서적 같은 것들을 수입하기도 했다. 탐라(제주)를 통해 오키나와와도 무역을 했다. 1975년 신안 해저유물선에서 발견된 것을 보면 재미있다. 그 배에는 천주 침몰선의 유물과 비슷했다. 유물을 통해서 그 배는 14세기에 영파(寧波)을 출발해 며, 일본 교토의 동복사(東福寺)로 가는 배였다. 고려시대에는 동북아해의 모든 나라들이 바다를 통해서 부지런히 무역을 하는 시대였다.

이곳은 고려의 엘리트 지식인이 다녀간 곳이기도 하다. 당시 중국 여행자들의 순례코스이기도 했다. 특히 보타도가 그러했다. 고려 시대 이름 높았던 이제현(1287-1367), 나옹화상(1320-1376) 등이 그들이다.


▶ 세계 3대 기행문 ‘최부의 표해록’

최부(1454-1504)는 조선 성종 때 ‘제주삼읍추쇄경차관’으로 근무했던 관료였다. 그가 제주에서 근무 중 나주에 살고 계시던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급거 귀로에 오르다 추자도 인근에서 풍랑으로 표류하기 시작한다. 함께 동행 한 43명의 일행은 넓은 바다에서 사경을 넘나들다 중국 절강성 영파부 하산(현 대산)에 표착한다.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한국으로 항해하던 중 다시 표류한다. 중국 절강성 태주의 우두외양에 표착한다. 왜구로 오인 받아 심한 조사를 받는다. 심문 끝에 항주로 끌려가고, 항주에서 조선 관리임을 인정받고 풀려 나온다. 그는 넓은 바다 대시에 대운하(항주-북경)를 이용해 북경으로 이송된다.

중국과 한국의 근대사를 담고 있는 ‘남호’
최부는 이송되는 과정에서 강남의 여러 고을을 경유하고 구경하게 된다. 영파, 소흥, 항주, 소주 등이 경유지였다. 그는 풍속과 제도, 중국문화의 실상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해박한 지식과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조선 관료의 품위를 유지했다. 이는 중국 관원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비록 상중의 몸이었고, 타국의 관리에게 송환돼 가는 처지였으나, 지나는 곳들의 풍경 하나하나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이것이 바로 최부의 ‘표해록’이다. 마르코폴로 ‘동방견문록’, 엔닌 ‘입당구법순례행기’와 더불어 중국 3대 기행문 중의 하나가 됐다. 옛 중국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귀중한 문헌이 됐다.


▶마라난타가 거처했던 ‘천동사’

천동사(天童寺)는 산중 깊숙한 곳에 파묻힌 절이다. 천동사를 본 첫 느낌은 고요함이다.

어머니의 품처럼 편안해 보이는 지형 형세다.

절강성 영파 아육왕사 동쪽 25㎞ 지점에 위치해 있다. 1천7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절이다. 중국 내에서도 고대 사찰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고찰이다. 송나라 때 999동의 건물(전각)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730동이나 있어 웅장함을 유지하고 있다.

백제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가 거처했던 ‘천동사’
‘굉지’라는 유명한 선승이 거주할 땐 학인의 수가 무려 1만에 달했다고 한다. 지금도 부엌(공양간)에는 1천명분의 밥을 짓던 ‘천승과’(千僧鍋)라는 무쇠 솥이 걸려있어 그 때를 설명해 주고 있다.

대웅보전 앞에 멈춰 섰다. 스님들의 저녁예불이 한창 이어지고 있었다. 스님들이 봉행하는 예불소리는 웅장하고 장엄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부처님께 삼배를 올린다.

개방된 곳 외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 스님들이 참배객을 통제할 만큼 불자가 넘쳤다. 마라난타의 흔적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으나 접어야 했다. 인도에서 온 마라난타는 백제에 불교를 전하기 전, 이곳에서 수행을 했기 때문에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아쉽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나한전을 찾았다. 탁 트인 전망 아래로 보이는 것은 촘촘히 겹쳐진 전각의 지붕뿐이다. 나한전에는 18명의 나한이 커다란 대리석에 조각돼 있었다. 원래 장마철만 되면 산사태가 일어나 피해가 컸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18명의 스님이 나타나 절 옆으로 커다란 도랑을 팠고, 그 후 산사태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 18명의 스님을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 나한전이라고 한다.


▶중국 공산당 혁명 성지 ‘남호’

남호가 있는 가흥은 참 한적한 소도시였다. 유명한 남호가 보인다. 넓은 호수가 참 평화롭게 보인다. 배를 타고 이곳저곳 구경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어 포기했다.

남호는 항주의 서호 축소판 같다. 도심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조용하고 깨끗한 호수다. 수양버들, 나무 벤치, 그리고 하늘을 품은 호수의 풍광이 아름답다. 넓은 호수와 잘 정리된 길 때문에 계속 걷고 싶은 곳이었다.

남호에는 회경원이란 정원이 있었다. 정원을 들어오면 아름다운 호수 전경이 쫙 펼쳐진다. 전동보트 타고 돌아다녀야 하는 끝이 없는 큰 호수다. 가흥에서 제일 유명한 호수인 이유를 알 것 같다. 보통 보트는 호수 안에 있는 호심도를 왕복했다. 호심도엔 유명한 정자인 연우루(烟雨樓)가 있었다. 흡사 항주의 서호와 같은 느낌이다. 단지 푸른 빛의 서호와는 달리 황톳물이었다.

그러나 남호가 유명한 데는 따로 그 이유가 있었다. 1921년 중국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회의가 열렸던 곳이었다. 한마디로 중국 공산당 혁명 성지인 것이다. 그래서 호수 옆에는 공산당혁명기념관도 있어서 공산당 창립 때의 시대적 상황을 자세히 둘러볼 수 있게 돼 있다. 당시 1921년 전국대표자들이 이곳 호심도에서 작은 유람선을 빌렸다고 한다. 그리고 배 위에서 유람선 회의를 했다고 한다. 배위에서 중국 공산당 탄생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남호 서쪽에 있는 매만가(메이완)로 향했다. 김구 선생 피난처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상해에서 벗어나서 잠시 피해있었던 곳이다. 2년여 머무르다가 내륙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독립을 위해 계속해서 피신하며 파란만장한 생활을 영위했던 현장이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고초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곳이다.

가흥은 중국 공산당의 성지이기도 하지만 대한민국 독립운동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김구 선생의 피난처와 한국 임정요원 주거지가 있기 때문이다 .

김구 선생 피난처에 도착했다. 1932년 상해에서 윤봉길 의거 후 일본 감시가 심해지자 잠시 피난했던 곳이다. 최근 보수공사로 외관이 말쑥했다. 2층 목조 건물이다. 1층에는 접견실 겸 식당, 2층은 임정 요원들과 김구 선생의 침실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침대와 옷장이 전시돼 있었다. 마루바닥에는 비상탈출구가 있었다. 당시 일본 경찰이 잡으로 오자 1층 비상구를 이용해서 배를 타고 피신했다고 한다. 지금도 집 뒤편 호숫가에는 탈출용 배가 묶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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