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2일(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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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석 박사의 뮤지엄 읽기] (10) 십시일반(十匙一飯), 문화유산국민신탁 운동
“나눔·공생 가치 실천, 성숙한 문화시민의 자세”

  • 입력날짜 : 2018. 05.30. 18:42
미국을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지난 22일 오후(현지시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136주년과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개설 1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주미 대한제국공사관을 방문, 전시실을 둘러보고 있다. 이 공사관은 1889년 2월 우리 역사상 최초로 서양국가에 설치한 외교공관이다. /연합뉴스
서울역 앞을 지날 때면 아침인데도 삼삼오오 보도블록에 주저앉아 술판을 벌이는 노숙인들을 자주 보게 된다. 이미 빈 술병이 사람 수 만큼이나 널브러져 있는 걸보면 그 자리가 새벽을 지나 계속되고 있음을 알게 한다. 행인들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소란을 피우기도 해 지나가는 여성들이나 아이들의 불안감을 커지게 한다. 누구에게는 아들이고, 아버지이며, 남편일 텐데 어쩌다 이렇게 거리에 내몰렸을까. 이런 노숙인들은 IMF를 계기로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가 됐다. 이들을 볼 때면 착잡한 심정을 가눌 수가 없다.

윤태석
한국박물관협회 기획연구실장·문화학 박사
식사 때가 되면 풍경은 사뭇 달라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울역에서 남영역 쪽으로 뻗은 인도에 긴 줄이 늘어선다. 급식을 위해서이다. 이들에게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몇몇 시민단체가 모여 무료급식소를 운영하고 있다. 공공기금과 기부금 등으로 운영되는 무료급식소는 이들이 우리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다시 들어와 건강하고 밝은 사회를 함께 만들어갔으면 하는 바람과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자기 가족이나 친분이 있는 이들 중에 노숙 인이 없다면, 이들이 밥을 먹던, 어떻게 살던 관심이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지속적으로 우리사회의 주변인으로만 살아간다면 소통과 통합, 상생과 공존이라고 하는 사회공동체가 지향하는 가치의 저해는 물론 불확실성과 불안의 잠재요인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일원으로 수용해 함께 공생하는 여건을 마련해 줘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개인이 담당하기에는 그 동기나 부담이 너무 크고 지속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국가나 공공의 힘이 필요하며 시민들의 노력도 모아져야 한다. 이와 같이 개인의 선호에 맡겨서는 최적의 성과를 낼 수 없기 때문에 정부나 사회, 공공적 재정을 통해 공적 욕구인 가치욕구(merit wants)를 충족하는 재를 가치재(價値財·merit goods)라고하며 의무교육, 학교급식, 국방, 문화유산보존, 박물관 건립·운영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중 인류와 민족을 증거하는 문화유산을 수집·발굴하고 연구·조사해 보존, 전시, 교육하는 박물관 건립과 항구적인 운영은 그 자체가 엄청난 재원과 수고가 수반되는 비영리활동이다. 개인과 집단의 문화정체성에 관심이 커지고 있는 오늘날 이 분야는 국제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가치재로 인식되고 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구입해 관리하고 있는 ‘보성여관’(등록문화재 제132호).
이에 관심을 가져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해야 할 일을 개인의 헌신과 노력만을 동력삼아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는 이들이 사립 박물관과 미술관장들이다.

이들의 숭고한 과업을 생각할 때 존경에 앞서 미안한 맘이 들 때가 많다.

이렇게 90평생을 살다가 지난주에 쓸쓸히 눈을 감은 이가 있다. 우리나라 박물관계의 산 증인인 한국자수박물관의 허동화(許東華·1926-2018) 선생이다.

탈춤으로 유명한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나 광복과 함께 자유를 찾아 월남한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60년대 중반부터 우리 문화재를 수집해, 1971년에는 서울 용산에 박물관 형식의 전시장을 열게 된다.

다른 자료에 비해 화려하고 미적인데다 우리 미감을 잘 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수집가들에게 외면 받고 있던 자수(刺繡)가 그 무렵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에 매료된 허동화 선생은 이후 자수와 보자기를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여러 권의 연구서도 발간하면서, 국내외에 50여회의 전시를 통해 자수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알려나갔다.

이런 숭고한 노력이 오늘날 우리 자수가 문화재의 반열에 당당히 오르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그는 평생의 수집품인 자수사계분경도(刺繡四季盆景圖·보물 제653호)를 비롯한 국가보물 2점과 중요민속자료 3점 등 자수와 보자기 류 2천여점을 서울시에 기증하는 것을 완성한 후, 죽음도 알리지 말고 빈소도 차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유명을 달리했다.

한달여 전 필자에게 주신 전화통화가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선생의 별세는 필자는 물론 남은 이들을 더 아프게 한다.

문화유산의 보존이라고 하는 가치 있는 일을 하는 대표적인 단체가 재단법인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이다. 이 단체가 실무를 총괄한 역사적인 사건이 지난 주 미국 워싱턴 DC에서 있었다. 주미 대한제국공사관이 113년 만에 우리 품으로 돌아온 것이 그것으로, 1889년 구한말 우리 외교관들이 처음 입주했던 130년 전 모습 그대로를 복원해 태극기가 게양되던 그 순간은 우리들에게 감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대한제국공사관은 조선의 자주성을 표방하려던 고종황제의 의지에 의해 1891년에 사들여졌다. 그러다 1910년 일제에 단돈 5달러에 빼앗긴 이후 우리 역사에서 사라진 듯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이 건물을 찾아냈고, 2012년 350만 달러에 환수하는데 성공했다. 6년에 걸쳐 철저한 고증과 원형 복원공사를 마친 후,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지난 22일 역사유적기념박물관으로 개관하게 된 것이다. 힘없는 약소국의 아픔과 망국의 한을 고스란히 소장한 채 근대 대미 외교의 상징으로 미국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가치 있는 일을 하기 위한 단체가 바로 문화유산국민신탁인 것이다.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 운동으로 잘 알려진 국민신탁은 1895년 영국에서 처음 시작된 ‘민간차원의 문화유산 및 자연환경 영구 보전’활동이다. 이 운동은 2010년 현재 영국, 미국, 캐나다, 네덜란드, 호주, 일본, 대만, 인도 등 전 세계 30여개 국가에서 민간주도·민관합작 등 다양한 형태로 활성화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00년에 민간차원에서 처음 도입됐으며, 2006년에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자산에 관한 국민신탁법’이 제정되면서 국가차원에서 국민신탁운동을 육성·지원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이를 계기로 문화재청의 주도하에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창립(2007년 3월25일)됐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은 다섯 가지 중점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첫째 ‘매입·증여 문화유산 관리’로 종로구 통인동에 있는 ‘이상의 집’을 구입해 개보수를 통해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李箱·1910-1937)이 3-23세까지 거주해온 이 건물은 지금까지도 그의 체온이 느껴지는 듯해 보존은 물론 활용의 가치가 매우 큰 문화유산이다.

두 번째로 ‘국가소유 문화유산 위탁관리’업무이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으로도 잘 알려진 보성군 벌교읍 소재 구 보성여관(등록문화재 제132호)을 문화재청으로부터 위탁받아 현재는 숙박업, 카페, 예술가 창작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세 번째로는 ‘문화유산 보전협약을 통한 보존’으로 문화재소유자와 문화재 보전 및 관리지원을 위한 상호협약을 체결해 대상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사업이다.

이를 근거로 신탁은 우리나라에서 주조장 중 원형과 자료가 가장 잘 보존돼 있는 ‘남평주조장’(나주시향토문화유산 제27호, 1932년 설립)과도 보존협약을 맺을 예정에 있다. 다음으로 ‘문화유산 조사 및 연구사업’도 중요한 업무다. 보전 대상 문화유산의 발굴 및 현황파악을 목적으로 하는 이 사업은 전국 주요지역 지정, 등록 및 비지정 문화재를 대상으로 한다.

끝으로 ‘시민사업 및 대외협력사업’으로 민간 차원의 문화유산 봉사활동 활성화를 위해 문화유산 봉사활동 활성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문화유산 및 국민신탁운동의 이해를 돕기 위한 시민강좌도 개최하고 있다.

사회공헌활동에 관심이 많은 기업 및 NGO 등과도 파트너십을 형성해 시행하는 다양한 활동도 이에 해당한다.

이렇듯 노숙인의 자활을 돕는 일, 나라를 지키고 의무교육과 학교에 급식을 하는 일은 우리 공통의 과제이며 책임임이 분명하다.

또한 평생을 문화재를 찾아 연구하고 알려왔으며, 박물관을 설립해 운영해 왔던 허동화 선생님의 숭고한 과업,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일반시민이 십시일반 모아준 기금으로 주미 대한제국공사관을 구입해 우리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한일 등도 우리들이 함께해야 할 소중한 일이다.

시민들의 참여는 물질도 좋지만 재능과 시간을 나누는 것도 큰 가치가 있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성숙한 문화시민의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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