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8일(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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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곧 색채’ 새로운 예술에 대한 집념…인상주의로 꽃피워
그림밖 화가들
예술과 돈, 경계에 선 화가 클로드 모네

  • 입력날짜 : 2018. 11.08. 18:56
모네 作 ‘아르장퇴유의 양귀비 들판’
죽음을 맞이하기엔 너무 이른 겨우 32살, 카미유는 점점 삶의 시간을 잘라냈다. 가쁜 숨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희미한 순간, 모네는 그녀의 얼굴에서 또 다른 색과 빛을 봐버렸다.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를 미묘한 빛과 색채들은 모네의 마음과는 달리 이미 시선을 장악해버렸다. 청색에서 노랑으로, 그리고 회색으로 변하는 찰나의 순간 손에는 붓이 들렸다. 그 절망적이고도 애달프게 숨죽인 순간, 이제껏 그려보지 못했던 새로운 색들이 만들어졌다. 어찌 생각하면 잔인하게도 임종의 순간이다. 아내를 끌어안아주기보다 죽음이 장악해가는 얼굴에 파고든 색들을 부여잡았다.

누군가는 모네의 이러한 사실에 경악하며 그를 비난하기도 했지만, 모네에게 빛과 색은 그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의 경계는 그림이 됐다. 회색빛과 푸르스름한 색 무더기 가운데 스러져가는 여인의 얼굴 위로 짓이겨진 붓 자국들엔, 비록 손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지라도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내는 순간의 슬픔과 절망을 그대로 껴안고 있다. 처연하게 힘을 잃어가는 얼굴 위로 희미하게 흩뿌려 내리는 빛, 생의 고리를 놓아버린 눈꺼풀, 쳐진 입술은 조용히 그림의 안으로 안으로 침잠해간다.

모네는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죽어가는 아내의 모습을 그릴 수밖에 없는 자신과, 이러면 안 된다는 또 다른 자신과 끝없는 사투를 벌였으리라. 손에 들린 붓은 이미 죽음의 색들을 그려갔지만, 마음만은 아내와 함께 한 순간을 하염없이 상기시켰을 것이리라….

아내 카미유가 세상을 떠나기 5년 전, 1874년 봄, 미술사의 혁명과도 같은 인상주의의 첫 전시회가 열렸다. 모네, 르느와르, 드가…. 살롱에서 번번히 낙선했지만, 자신들이 추구하는 예술세계에 대한 믿음만은 확고했던 젊은 야망들은 똘똘 뭉쳐 새로운 예술을 선언했다. 허나 결과는 외면 그 자체였다. 야심차게 준비했던 전시회도, 전시 이후 작품경매까지도 대중들은 철저하게 외면했다. 새 시대의 예술을 추구한 이들의 맨 앞에는 모네가 있었다. 아직 이들의 예술을 인정받기엔 세상의 흐름은 더뎠고, 준비한 모든 것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더욱이 신마저도 모네를 감싸주지 않았다. 오로지 그림에만 매달렸기에 궁핍한 생활고는 당연지사였고, 아내인 카미유는 아프기 시작했다.
모네 作 ‘산책’

그림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었던 애송이 같은 화가에겐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번갈아 돈을 빌려가며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의 생을 이어갔고, 겨우 약값을 버텨낼 수 있었다.

젊고 패기 넘쳤던 열정만큼이나 현실의 삶은 혹독했다. 돈 없이는 아내를 치료할 수 없었고, 현실의 생활도 버텨낼 수 없었다. 제 아무리 불타오르는 예술에 대한 열정일지라도 열정은 열정일 뿐, 현실의 삶을 지속케 하진 않았다. 그림이 팔리지 않고서는 아내의 약 하나도, 빵 하나도 살 수 없었다.

카미유와 모네의 만남은 화가와 모델로 시작됐다. 환영받지 못한 시작이었다. 콧대 높던 모네였지만 카미유의 매력 앞에 모네는 무너졌다. 둘은 결혼도 하기 전 동거에 들어갔고, 아들 장까지 태어났다.

카미유와의 사랑을 지속하기엔 부모님의 반대가 극심했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유일한 금전적 지원마저도 사라졌다. 그래도 사랑하는 아내를 화폭에 담아가며 그림에 대한 열정은 더욱 타올랐다. 카미유는 단지 모네의 모델뿐만이 아닌 그의 그림에 대한 새로운 실험을 가능케 해주는 존재였다. 모네는 그녀의 모습을 그려가며 새로운 ‘빛’을, ‘색’을 발견했다. 아들 장과 함께 그려진 ‘아르장퇴유의 양귀비 들판’과 ‘산책’, 그리고 인상주의 두 번째 전시에 출품된 ‘일본풍 옷을 입은 모네 부인’ 등 카미유는 가히 모네의 인상주의를 끌어 낸 모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모네는 오로지 가난하고 열정만 가득한 세상물정 모르는 화가였을까. 아니다. 모네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모네는 이미 15세에 예술적 재능을 경제적 가치로 인정받았었다. 어린 모네는 캐리커처를 너무도 능숙하게 그려냈고, 중학생 신분으로 파리가에 있는 재료상 ‘그라비에’의 진열장에 전시도 하며 1점에 약 20프랑씩을 받기까지 했다. 캐리커처를 그려 번 돈으로 저축을 하고 파리여행을 계획하기도 했다. 모네는 자신이 그 일을 계속했다면 아마 억만장자가 됐을 것이라 호언장담하기도 했지만, 결국 모네는 돈이 아닌 예술을 꿈꿨다.

1879년 인상주의의 4번째 전시가 열리던 해 아내 카미유는 사망했고, 당시 모네의 작품을 사주던 부호인 에르네스 오슈데의 부인인 알리스 오슈데가 모네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예술보다는 돈에 가까웠던 에르네스 오슈데 덕분이었을까. 알리스에겐 예술가인 모네의 모습이 더 멋져 보였을런지도. 또 가난하지만 자존심만은 굽힐 수 없었던 모네를 관대하게 품어준 알리스 부인의 너른 마음도 모네에게는 또 다른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허면 모네는 오로지 새시대의 예술을 추구한 실험적 그림만을 고집스럽게 그렸을까? 카미유의 사망 이후 아내의 시신을 그렸다는 수상한 소문은 일순간 파다해졌고, 거기에 더해 자신을 후원해주던 오슈데 부인과의 묘한 관계까지 더해지며 악재는 중첩됐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모네는 팔기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 풍경화보다 더 비싼 가격에 거래되던 정물화를 그렸다. 모네는 그 모든 것들을 그리는 재주가 누구보다 탁월했다. 하지만 단지 재주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끝없이 새로운 예술을 탐닉했다. 예술과 돈의 경계에서 여느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모네의 선택도 매번 예술이었다. 돈의 안락함보다는 예술의 험난함을 택했고, 결국 험난함은 모네에게 예술가로서 최고의 영광을 거머쥐게도 했다.

두 번째 부인인 알리스와 지베르니 정원을 가꾸며 그림을 계속 그려갔고, 시력악화로 힘들었던 시기를 제외하곤 한없이 오로지 그림에만 매달릴 수 있었다. 모네의 그림값도 자꾸만 뛰어 모네가 사망하기 2년 전에는 그림 한 점에 4-5만 프랑(한화 약 4-5천만원)에 거래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생존 작가로는 이례적으로 오랑주리 미술관을 자신의 작품으로만 채웠다. 시력악화로 제대로 볼 수 없고, 제대로 그릴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제외하곤 한없이 그림 안에서 안락했고, 예술가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끌어안았다.
문희영 <예술공간 집 관장>


다시, 지난 글의 고흐를 생각해보며 모네에겐 예술과 돈의 경계는 어느 지점이었을까.

모네도 때론 예술을, 또 때론 돈을 택했다. 허나 그에게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예술’이 더욱 마음 안에 들끓었고, 이는 미술사를 가로지른 거대한 전환점이 됐다. 인상주의를 함께 시작한 르느와르 마저도 세상을 떠나고 자신이 ‘인상주의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모네. 그의 그림 한 점에서 발아된 인상주의는 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인상주의의 종말과도 같은 모네의 생애 마지막 순간, 그에게 ‘예술’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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