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6일(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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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밖 화가들]예술과 돈, 경계에 선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예술도, 돈도 아닌 캔버스에서 찾은 자신만의 낙원

  • 입력날짜 : 2019. 07.11. 18:35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1876-오르세미술관, 파리
1900년, 프랑스인에게 최고의 영예랄 수 있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주인공은 르누아르였다. 예순을 맞이한 화가는 그 영광을 충만하게 만끽했다. 지난 시간을 생각해보면 오로지 그림을 향한 열정이 있었기에 이겨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예순의 나이, 부족한 것은 편치 않은 건강 뿐이었다. 창작열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고, 가난도 이미 떠나간 지 오래였다. 그림은 더욱 더 궤도를 열렬히 순항하지만, 조금씩 흔들리는 손가락을 얌전히 붙잡는 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었다.

조금씩 엄습해오던 류마티즘과 중풍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괴롭혀 왔다. 손가락은 자꾸만 휘어져갔고, 손톱도 살의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붓을 쥔 손이 자꾸만 제 자리를 찾지 못했다. 결국 손과 붓을 붕대로 꽉 조일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은 마음대로 못할지언정 손의 힘은 조금이나마 의지할 수 있었고, 또 가끔은 왼손으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지난날 팔이 부러졌을 때도 왼손으로 그림을 그렸다. 가끔은 오른손으로 그림을 그릴 때보다 나을 때도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몸을 감싸는 모든 세포들은 마치 그림을 위해 존재했던 게 아닐까.

1919년까지 평생에 걸쳐 그린 5천점의 그림들, 그 중 말년 즈음인 12년 동안 그려진 그림이 무려 800여점에 달한다. 나이 듦도, 손의 불편함도 그림 앞에서는 모두 무기력했다. 그림을 그리기에 방해되는 모든 것들은 다 이겨냈다. 오로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세상 그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게 르누아르였다. 정말이지 그 모든 것들을 다 제압했다.

르누아르는 가난한 노동자 계층이었던 부모님 아래에서 태어났다. 곧잘 그림도 그렸기에 열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었지만, 도자기 공장에 취직하고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며 그의 그림 인생이 시작됐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기계화의 물결에 밀려 결국 실직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씩 모은 돈과 그의 실력으로 당당하게 에꼴 드 보자르에 입학했다. 살롱에 작품을 출품하고 화가로서 성공하는 삶을 꿈꿨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살롱에도 몇차례 낙선하고, 화가로 이름을 날리며 주문이 쇄도하게 그림을 그리는 건 저 먼 이야기들이었다.
‘피아노치는 소녀들’ 1892-오르세미술관, 파리

스무살 무렵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워가며 모네, 바지유, 시슬레 등을 만난 건 운명과도 같았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후원자와도 같았던 바지유, 그리고 인상주의를 시작한 모네와의 예술적 교감은 르누아르의 그림을 한발짝 성큼 나아가게 했다. 하지만 열정만으론 어려운 일, 가난했던 르누아르와 모네에게 바지유는 천사같은 존재였다. 부유한 집안 출신인 바지유가 그림도 사주고, 화실도 빌려준 덕에 르누아르는 그의 열정을 지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낱같은 도움도 길게 가진 못했다. 보불전쟁이 일어나며 르누아르도 친구들도 모두 전쟁에 소집되었다. 참혹하게도 바지유가 전쟁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유일한 희망의 끈이었던 친구였기에 그의 죽음은 가히 충격 그 이상이었다. 그림 그리는 재주만으론 버텨낼 수 없는 현실을 조금이나마 버틸 수 있게 바지유였다. 이런 바지유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운명을 달리했고, 더 이상 매달릴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그림뿐이었다. 모네와 함께 르누아르는 더욱 그림에 매진했다. 스스로 화상을 찾아가 작품을 팔아달라고 부탁까지 하는 등 가난한 화가의 삶은 우울했지만, 르누아르의 그림은 그와는 정반대로 밝고 화사한 기운이 넘쳐갔다.

1874년 인상주의의 첫 전시, 새로운 예술을 꿈꾸는 패기 넘치는 화가들이 열어젖힌 새 시대의 역사적 전시가 열렸다. 같이 그림을 배워가던 모네를 중심으로 드가, 피사로, 시슬레 등과 함께 그 중심에 르누아르도 있었다. 그때까지도 가난은 줄곧 르누아르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그의 그림엔 아름다운 빛과 찬란한 색채들에 휩싸인 사람들로 가득했다.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1876)는 르누아르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로, 화면 가득 축제의 기운이 가득하다. 마치 바로 곁에서 시끌벅쩍한 축제의 장이 펼쳐진듯 생생하다.
‘선상 파티의 점심’ 1881-필립스 콜렉션, 워싱턴D.C

르누아르가 인상파 그림들 사이에서 자신의 길로 선택한 건 바로 인물이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을 머금은 자연풍경을 묘사하던 모네와 달리 르누아르는 인물에 집중했다. 지극히 현실적 판단이었다. 모네의 풍경묘사는 따를 자가 없었다. 하지만 르누아르에게는 인물을 그려내는 탁월한 힘이 있었다. 게다가 초상화가로 조금씩 인정받고 알려지며 주문도 꽤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르누아르는 예술과 돈이라는 경계에서 오로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그림그리기를 선택했다. 물론 현실의 삶까지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귀족들에게 주문이 이어졌고, 그 자신 또한 다른 작가들과 달리 더욱 숙련돼 가는 인물 그림들에 만족했다.

르누아르는 여덟 차례 열렸던 인상주의 전시회 중 단 네 번의 전시회에 참여한 뒤, 자신만의 길을 다시 선택했다. 인상주의가 추구하던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의 묘사보다는 고전으로의 회귀를 택했다. 그 결정적 계기는 이탈리아로의 여행이었다. 작품을 조금씩 판매하며 가난에서 벗어난 르누아르는 당시 브루주아들의 특권이랄 수 있는 여행이 가능해졌다. 고전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시대 거장들의 작품에 매료됐다. 르누아르의 영혼을 가장 매혹시킨 건 라파엘로의 작품들이었다. 고전주의에 심취하며 그림들을 연구했다. 살롱전에서 대상을 거머쥐기도 한 르누아르에게 가난은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 여전히 인상주의를 추구하던 친구들과 불협화음이 있기도 했지만, 그의 고집은 더욱 그림 안으로 파고들어갔다. 그를 위협했던 것은 오로지 건강이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가락의 고통을 덜어주길 바라며 프랑스 남부로 이사를 했다. 빛을 머금은 자연 아래 생동하는 이들의 모습은 더 그림에 대한 열정을 타오르게 했다. 단연코 르누아르만의 그림은 더 이상 따라갈 자가 없었다. 그림이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아름다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감각을 끝없이 관람자들의 마음 안으로 파고들었다.
문희영 <예술공간 집 관장>

힘겨운 현실도 그림 안에서만은 즐겁고 행복함으로 바뀌었다. 보불전쟁에 잇따라 파리 코뮌 등 현실의 우울함은 그림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낙원만이 존재했다. 현실을 넘어설 수 있음을 가능케 함은 바로 그림이기에 가능했다.

예술도 돈도 아닌 자신의 그림을 끝없이 택했던 르누아르, 나이 지긋해진 노화가의 손에 쥔 붓끝은 그의 손과 하나였다. 붕대로 꽁꽁 묶여진 손과 붓은 변함없이 아름다운 삶의 단면들을 그려냈다.

“그림이란 즐겁고 유쾌하며 예쁜 것이어야 한다. 가뜩이나 불쾌한 것이 많은 세상에 굳이 그림마저 아름답지 않은 것을 일부러 만들어낼 필요가 있을까?” -르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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