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8일(일요일)
홈 >> 기획 > 기획일반

[그림 밖 화가들]예술과 돈, 경계에 선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자유로운 예술혼’ …가장 낮은 곳에서 진솔한 삶을 사랑하다

  • 입력날짜 : 2019. 11.27. 19:27
로트렉 作 ‘in bed’ (1893·오르세미술관)
1888년 브뤼셀에서 열린 ‘20인전’, 스물넷의 로트렉은 다른 여러 화가들과 함께 전시를 했다. 스무 명의 화가들 사이 로트렉의 그림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었다. 가문의 힘이 아닌 로트렉 스스로가 일군 시간들의 보상이었다. 좋지 않은 불편한 모양새를 가진 몸으로는 귀족들의 무리에 섞일 수도 없었고, 그리 하고 싶지도 않았다.

장애의 몸이었지만, 신의 관대함으로 특별한 허락을 받은 건 ‘눈’과 ‘손’. 그 특별한 두 가지는 마르지 않은 샘이었으니, 깊은 샘 속 끝없이 솟아나는 본능은 로트렉의 진짜 운명을 이끌었다. 신이 준 특별한 운명, ‘그림’만은 로트렉의 빛이었다.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아야 한 다는 게 확실해졌고, 스스로를 지탱해줄 것은 그림이라 생각했던 게 8년이 지났다. 삶에서 무언가 빠져나가고, 또 무언가는 채워졌다. 몸은 온전치 않았지만, 더 민첩하고 예리해진 눈과 마음이 진두지휘하는 대로 따라갈 수 있는 ‘손’은 세상 많은 것들을 마음껏 그릴 수 있게 했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 Lautrec)은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 눈에 보이고 손에 쥘 수 있는 많은 것들이 미리 준비된 운명을 가진 사람이었다. 본래 이름은 앙리 마리 레이몽 드 툴루즈-로트렉-몽파 (Henri Marie Raymond de Toulouse Lautrec Monfa), 혈통과 영지 등 나타내야 할 것이 많아 한번에 부르기도 힘든 이름이다. 귀족의 신분을 가진 부모, 거대한 저택, 많은 유산. 인간의 욕심은 이 모든 것들을 놓고 싶지 않게 했고, 과욕이 낳은 이기심은 아무것도 모르는 생명에게 서둘러 가혹함을 점지해 둔건 아닐까.

로트렉의 아버지는 남프랑스 알비에 있는 보스크 성에 사는 백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고, 어머니와는 사촌지간이었다. 둘의 혼인은 명문 귀족인 그들이 절대자로서의 위엄을 놓고 싶지 않았던, 멈출 수 없는 군림의 대가를 치르게 했다. 오랜 기간 이어진 근친결혼으로 허약체질은 자연스러웠고, 영민했지만 몸이 성치 않았던 로트렉의 발육은 더디기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1년 간격을 두고 발생한 두 번의 사고로 두 다리가 부러지는 아픔을 겪고, 성장은 멈췄다.

로트렉이 살았던 대저택 보스크 성의 회랑에는 152㎝에서 더 올라가지 못한 눈금 치수가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상반신을 지탱해야 했던 약한 다리는 점점 비틀려갔고, 거위 같은 걸음을 걷게 했다. 부자연스럽게 부은 입술과 혀는 발음조차도 부정확하게 만들었다. 수많은 재물도 지위도 결코 해결해줄 수 없는 일, 로트렉은 백작의 운명이 아닌 화가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신이 건강을 허락지 않은 몸은 귀족이란 신분에서 스스로를 빠져나오게 했다. 신분의 굴레가 벗겨지자 세상 속 다양한 것들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몽마르트르로 모인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한 것은 로트렉의 몸 덕분이 아닐까. 부와 명예가 이미 쥐어졌지만 불구의 몸으로는 손에 다 쥘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신분으로 규정된 겉모습이 아닌 진짜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로트렉 作 ‘self-portrait in the crowd (background center-left), at the moul’
로트렉은 이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그려갔다. 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끝나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벨에포크(Belle Epoque) 시대로 여가와 유흥문화가 확산됐고, 자연스레 몽마르트르에는 ‘물랭 루즈’(Moulin Rouge)와 같은 댄스홀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고, 즐거움과 쾌락을 찾았다.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춤을 추고, 때론 술에 기대어 삶의 무게를 벗어보려도 했던 이들의 솔직한 모습들. 그 모든 것들이 로트렉의 시야에 들어왔다. 즐거움에 취한 사람들도, 심오한 예술에 몰입한 사람들도, 시끄럽게 토론에 열중하는 사람들도 모두 한데 어우러지는 몽마르트르의 모습은 로트렉에게 일기처럼 그려져 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빠르게 관찰하는 정확한 ‘눈’과 ‘손’은 그 모든 것들을 그림으로 남겨 놓는 것을 가능케 했다.

신분이나 지위를 막론하고 이들을 객관적 시선으로 그려갔다. 낮은 신분의 이들을 애잔하게 바라보거나, 귀족들을 비판하는 등의 도덕적 관념에 개입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 인간으로 바라본 모습을 그대로 그려갔다. 그가 교우한 사람들도 귀족, 예술가, 지식인, 작가, 배우, 단원, 무용수, 운동선수, 창녀 등 다양한 계층의 이들이었다. 로트렉에겐 이들을 그려가는 것이 관심사였고,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는 인상주의 폭풍이 막 지나가고 새로운 여러 예술사조가 꿈틀대던 시기였지만, 로트렉은 그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다양한 삶의 풍경들을 그려갈 뿐이었다.
로트렉 作 ‘the laundress’ (1884-1888·개인 소장)

이른 나이에 대중적 인기도 얻었고, 같은 동료 화가나 비평가들에게도 꽤 호의적 평가를 얻었다. 꽤 많은 전시에도 참여하고, 고흐의 동생인 테오가 운영하는 화랑을 통해 거래도 활발했다. 하지만 불규칙한 생활과 많은 연인들과의 함께한 무분별한 생활로 인해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됐다. 정신착란 증상까지도 나타나며, 결국 몸의 마비증상을 겪고 37세가 되던 해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37세의 이른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유작은 무려 4천700여점. 유화, 드로잉, 수채화, 판화와 포스터 등 예술성에 상업성까지도 가능했던 엄청난 양의 작품은 그의 열정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무언가를 바라보고 그려내는 일, 결국 로트렉은 자신 또는 타인을 규정한 여러 사회적 판단이 아닌 스스로가 바라본 세상을 그렸다. 변화해가는 사회 속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들, 그리고 사회적 신분을 떠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철저하게 객관적 시선으로 그려냈지만, 이런 시선조차도 로트렉이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신분의 굴레에 안착하지 않았기에,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었고, 장애의 몸으로 바라본 인간의 아름다운 육신이기에 더욱 역동적으로 그려질 수 있었지 않았을까.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힘겨움도 즐거움도 멋짐도 모두 담을 수 있었던 로트렉의 더 깊고 특별한 눈과 손, 바로 예술과 삶을 넘나드는 한없이 자유로운 도구였다.

“인간은 추악하지만, 인생은 아름답다” - 로트렉.
문희영
<예술공간 집 관장>




▶ 디지털 뉴스 콘텐츠 이용규칙보기





많이본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