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11일(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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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40주년기념 큐레이터 장경화 '오월의 미학'](10)한희원
무거운 주제를 고독과 슬픔의 서정에 담다

  • 입력날짜 : 2020. 07.28. 17:53

한희원은 교육자인 부친을 따라 유년시절부터 지방을 전전하면서 형제들과 떨어져 혼자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리고 고교시절 운동이 좋아 무도인(태권도)이 되고자 했었다. 그러나 부친의 문학적(희곡으로 조선일보 등단, 1935년) 영향은 시(詩)창작과 화업(畫業)의 길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게 했다.

대학시절부터 기독교를 통해 시대를 읽어가는 눈을 뜨면서 사회에 소외된 자, 억압받는 자가 보였고 정당치 못한 시대에 그의 투박한 붓은 무기로 벼리고 또 벼렸다. 그는 무거운 시대(‘80-’90년대)를 숨가쁘게 관통하면서 거친 예술적 성과물을 내놓았다. 유년시절부터 고독孤獨은 그의 그림자가 되고 육신이 되어 작시作詩와 함께 그림을 그려왔다. 이제 그의 예술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고독을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는 슬픔의 서정성으로 그리고 이제는 시대와 이념을 뛰어 넘는 ‘영혼의 자유’와 ‘평화’를 예술로 새기고 있다.


▶청년화가가 마주한 무거운 시대
한희원은 미술대학 입학과 졸업 후 군에 입대를 한다. 그러니까 군생활(‘79-’81)을 강원도에서 광주의 폭도 소식을 접하며 걱정과 우려의 시간이었다. 이렇게 그에게 ‘5월 광주’는 지나가게 된다.

입대하기 전, 대학4학년(‘78), ‘양림교회’(기독교, 장로회) 활동으로 얻게 된 지하 작업실에서 그의 첫 기념비적인 대형작품을 제작한다. ‘가난한 사람들’(1978)은 이듬해(‘79) 발표(사다리회)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대작이라 하면 100호 크기가 고작인데 그의 작품은 호수를 가름할 수 없는 크기(1500호?)였다. 그리고 지역화단은 자연을 재현하는 남도적 서정주의 화풍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 그의 작품은 어두운 잿빛과 검청색 톤으로 삶에 시달리고 일그러진 표정의 민중을 그린 것이다. 기층민의 좌절과 고통이 반복되는 무거운 삶을 고달프게 이어가는 민중의 모습으로 담아낸 것이다. 물론 대학생인 그가 이러한 시대성과 민중성을 주제로 그린 첫 작품은 형상력과 붓놀림, 미학적 아우라 등이 성숙되지 못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대학생 신분으로 상상을 뛰어 넘는 규모와 주제로 작품을 제작한 것이다.

1978년은 ‘민중미술’이라는 용어도 없었으며, 광주와 서울을 중심으로 진보적 그림은 개인적으로 제작하였고 진보적 미술단체 결성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던 상황이다. 이듬해인 1979년 진보미술인은 광주의 ‘광주자유미술인회’(9월)와 서울의 ‘현실과 발언’(11월)이 각각 태동되면서 작품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서 그는 어떠한 진보미술 단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교회와 학교생활 외에는 다른 활동에는 관심이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 190x500㎝ oil on canvas 1978년

‘가난한 사람들’은 대학생 신분이었던 그에게 큰 의지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더더구나 그는 민주전사로 화염병과 최류탄이 난무했던 시위현장을 뛰어 다녔거나 진보적 미술단체의 활동도 아니었던 점을 가만하면 그 성과물은 늦게나마 존중과 ‘한국 민중미술사’ 기록에 남겨야 할 것이라고 본다.

이후 그의 활동은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 ‘광주목판화연구회’, ‘임술년’ 등의 진보 미술단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한다. 이시기 주목할 전시회를 갖는다.

하나는 “민중미술이 민중과 함께 해야 한다”.는 그의 의지는 ‘장터전’(‘81-’91, 구례, 화계, 광양, 순천 등)으로 민중미술은 민중과 함께하고 자는 주제를 실천한다. 다른 하나는 그의 첫 번째 개인전으로 광주와 서울 순회전(‘93)으로 그가 청년작가 시기의 15년간을 성과물을 보여주는 야심찬 첫 전시였다. ‘가난한 사람들’(‘78)을 비롯 ‘여수로 가는 마지막 기차’(‘93), ’구례로 가는 길‘(’85) 등 5m와 3m의 대형작품들과 함께 장판지 위에 시골민초의 작품 다수 선보였다. 이 전시를 계기로 지역은 물론 한국미술계에서 그를 각인시킨 거둔 성과를 거둔 시기는 청년기였다.
1988년 순천아랫장터전

시詩 창작과 동시에 그림을 그렸던 한희원은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품으로 공명심이란 찾아 볼 수 없는 사람이다. 매사에 꾸준한 노력파인 그는 진정성과 성실성으로 붓을 벼려왔다. 말수가 없고 온순한 성품의 소유자, 내성적이면서 예술적 소명의식이 강한 그는 화가이자 시인으로 고독이라는 그림자를 친구로 삼아 마주했던 시대는 최루가스와 화염병이 난무하는 무겁고 우울한 시간이었다.


▶60여년 양림동과 ‘한희원미술관’
그는 초등학교 3학년시절에 양림동으로 이사하여 순천 교편생활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60여년을 살고 있다. 양림동은 서민지역으로 풋풋한 삶의 이야기와 기독교 토착지로 소중한 자료가 보존된 지역이다.

특히 한국예술계 선구자의 삶과 체취가 남아있는 공간이다. 그는 10여년여전부터는 작품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양림동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매년 마지막을 다짐하고 행사를 마치고 다음해 다시 간곡한 부탁을 거절 못하고 ‘굿모닝 양림축제’ 행사위원장 직을 올해도 수행한다.
한희원 미술관 by 안갑주 사진작가

그에게 양림동은 큰 길, 골목과 골목의 구석구석, 작은 집들과 전봇대 그리고 정스러운 사람 냄새가 풍기는 고즈넉한 풍경 모두가 그의 정체성의 하나하나가 되었다. 비오고 눈보라가 치고 바람이 날려도 우울하고 슬픔이 가득한 날에도 어김없이 양림동을 오가며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려가는 그에게 양림동은 예술이자 삶 자체이다. 이러한 양림동의 조용하고 고즈넉한 골목 소박한 한옥수리로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2015년)시켰다. 미술관은 그에게 더할 것 없는 소중한 공간이지만 양림동 전체에 문화적 활기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전시 외에도 작은 음악회는 지역민과 그를 아끼는 많은 지인 그리고 관광객이 함께 웃고 즐기는 시간이 되고 있다.


▶절대 고독의 슬픔과 투박한 미학어법
그의 예술은 현실성Reality과 함께 서정적 감동이 있다. 그리고 절대 고독함에서 오는 슬픔은 가슴 저린 애절한 서정적 감동으로 다가오게 한다.

그의 모든 작품에 배경이나 소재는 현실성에 두고 있다. 뒷골목과 밤풍경, 바람과 소리, 눈 내리는 풍경, 들판의 나무, 등 흔히 일상의 하찮고 평범한 서민의 삶이 묻어있는 친숙한 풍경이다. 그러한 풍경은 그가 타고난 성품과 문학적 향으로 화폭에서 빛을 발하고 표현의 한계를 넘어 비장한 슬픔을 동반하는 절대적 고독으로 다가온다. 이 지점에 그의 예술은 민중미술의 대중적 공감을 얻는 성공적 사례로 보고 싶다. 예술에 이념을 앞세우면 서정성을 잃게 되고 서정성을 앞세우면 이념은 휘발되어 형식만 남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예술은 Reality와 서정성을 동시에 확보한 좋은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을 따라 길을 걷다’ 300x132㎝ oil on canvas 2002년

그의 작품 ‘바람을 따라 길을 걷다’(2002)는 큰 캔버스에 황량한 들판에 홀로 있는 나무 한그루는 앙상한 가지만 남아 휘몰아치는 눈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조형적으로는 매우 단순한 작품이다. 무겁고 어두운 시대에 외롭게 버티는 거친 나무 가지는 곧이라도 눈바람에 부서지고 날아갈 듯 위태롭다. 이 나무는 오랜 시간의 우리의 삶을 지켜보았던 나무일 것이다. 이 나무는 외세와 부당한 권력, 탐욕스러운 자본가로부터 고통과 슬픔을 견디고 또 견디어 내는 우리 자신 일 수 있고 우리역사 일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이렇게 허허벌판의 나무와 눈바람을 상징적이고 은유적으로 끌어와 역사와 시대의 무거움을 무겁지 않게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황량한 눈바람에 거친 나뭇가지를 통해 그의 절대적 고독은 애절한 슬픔의 감동을 준다.

그는 매주 주말이면 가족이 있는 여수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던 고달픈 추억을 ‘여수로 가는 막차‘(1993)로 제작하였다. 별이 떠있는 깊은 밤, 삶에 지친 몸을 완행열차에 의탁하고 가족에게 돌아가는 곧 자신이자 서민의 풍경이다. 작품은 그가 즐겨 사용하는 검청색과 보라색 밤하늘 노랑별은 크고 밝아 별빛에 반사되는 산등성이는 두텁고 어렴풋하다. 그리고 어두운 밤을 헤치는 기차의 가냘픈 창문 빛이 끊어질 듯 연결된 완행열차는 그리운 가족을 향한 설레는 기다림보다 우울한 신비로움 속에 무거운 침묵이 흐르다. ‘여수로 가는 막차‘는 우리시대의 평범한 민중의 피곤함과 무거움이다. 그러나 한희원은 민중미술은 무거움을 별이 떠 있는 밤풍경의 서정성 뒤에 감추어 두고 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1889)을 연상케 한다.
‘여수로 가는 막차’ 61x46㎝ oil canvas 1993년

위의 두 작품은 두터운 물감과 거친 붓으로 매우 투박한 조형양식은 그의 독창적 회화기법이다. 이러한 투박한 형식미는 남도적 정서반영과 함께 그의 따뜻하고 고즈넉한 인간미의 투영일 수 있겠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마치 한편의 애절한 시를 읽어가는 슬픔과 때로는 고독함에 동화되어 카타르시의 감동을 얻는다. 그리고 모든 작품의 명제 또한 시 제목처럼 문학성이 돋보이는 것이 그의 예술에 큰 장점이다. 이렇듯 한희원은 Reality은 서정적 감정이입으로 고독한 슬픔을 자기미학으로 이끌어오는 과정에 나타나는 허무주의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트빌리시’의 1년과 ‘자유’와 ‘평화’
한희원은 오래 전부터 바쁜 일상으로 삶은 점차 피폐해지고 건강 역시 좋지를 않아 변화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는 오직 작업만을 위한 은둔의 삶을 꿈꾸어 온 것이다. 그래서 지인의 도움은 용기가 되어 모든 우려와 걱정을 뒤로하고 ‘트빌리시’에서 2019년 1년간 체류한다.

‘트빌리시’는 중세의 기독교 문화가 멈춘 정적인 도시이다. 그의 생활은 매일 그림과 시를 쓰고 음악을 듣는 정도가 전부로 간혹 산책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반복적 생활을 통해 360여점의 그림(25호)과 70여 편의 시를 창작하였다.

어찌 보면 그의 성향에 어울리는 도시에 체류하였다고 생각되어 진다. 그 누구의 간섭이나 방해가 없는 낮선 땅, ‘트빌리시’의 생활은 절대고독을 위한 최적의 환경이었을 것이다. 또한 새로운 예술적 화두와 양식의 변화를 위한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귀국 후, 그동안 제작한 성과물을 시집(이방인의 소묘)출판과 함께 전시를 하고 있다.(김냇과, 대인동)

그의 전시된 작품은 모두가 종이에 그렸으며, 다수가 드로잉적 성향이 짙다. 이 작품들에서 과거와 다른 실험적 작품이 눈에 보여 진다. 2000년대 들어 확대되는 민주화와 더불어 그의 예술적 화두는 참여예술(민중미술)에서 순수예술(예술지상주의)적 성향으로 점차 확장시켜 왔었다. 그러한 예술적 변화는 이번 전시에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즉, 과거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고독과 슬픔을 삭히고 넘어 ‘영혼의 자유’와 ‘평화’를 찾아가고 자는 예술적 주제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의 붓끝은 더욱 둔탁하고 거칠어 일부 작품은 형상의 단순화와 불분명으로 붓놀림 흔적만 남겨져 있으며, 색상과 톤은 밝아져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움을 실험하고 있다.

한희원은 이번 ‘트빌리시’ 귀국 전을 통해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자유’와 ‘평화’를 찾아가는 예술적 화두를 던진 것이다. 이제 그에게 예술적 이념은 중요치 않다. 오직 그에게는 예술 본질을 찾아 카타르시스와 ‘자유’와 ‘평화’의 바다에서 ‘5월 광주정신’을 어떻게 담아내고 자는 것인지 기대가 된다.


※작가 약력
한희원(1955년, 광주생)
▶조선대학교 미술학과 졸업
▶개인전 50회(일본, 광주, 서울, 수원, 대구 등)
▶초대전
2020 트빌리시기 귀국전, ‘이방인의 소묘’(김냇과),
시집발간(트빌리시에서 보낸 영혼의 일기)
May to Day 민주주의 봄(서울, 아트선재센터)
2019 세계수영선수권 대회 특별전(광주, 조선대미술관)
2017 완행버스 전(광주, 하정웅미술관)
2006 한국현대미술 투영전(대만국립미술관)
2005 사다리 30주년 기념전(광주시립미술관)
100인 100색전(서울 조선화랑)
2004 야생화 낮은 꽃의 노래(광주, 신세계갤러리) 외 다수
▶현) 사다리회, 새벽회, 무등회, 전업미술가협회원, 한희원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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