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23일(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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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40주년기념 큐레이터 장경화 '오월의 미학'](19) 김영진
시대에 맞선 붓끝은 신자유주의를 해명하다

  • 입력날짜 : 2021. 01.26. 19:46
김영진은 군, 장교 부친의 슬하에서 1남 3녀 장남으로 출생한다. 어린 시절부터 내성적이었던 그는 손재주와 그림이 재미있어 만화를 즐겨 그렸으며, 초등학교 6학년 시절부터는 미술학원에서 석고데생을 수업했었다. 그리고 중·고등학교에서 미술반활동을 하면서 ‘화가는 배고프고 어렵게 산다’는 말을 귀가 아플 정도로 수도 없이 들어야 했다. 고3시절 전국미술대회에서 큰 상을 받고 같은 화실에서 입시를 앞둔 동기생에게 데생과 수채화를 지도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으나 대학은 동기생보다 늦게 입학한다.

그는 80년대 초, 신학철의 ‘한국 근대사 연작’과 ‘현실과 발언’ 그룹의 작품을 접하고 비판적 리얼리즘에 눈을 뜨면서 자기미학의 방향과 함께 80년대 중·후반 사회과학서적 탐구로 이념적 무장을 했다. 한반도 상황인식을 남북분단이라는 실존적 고민을 주제로 한 작품 제작은 90년대에 접어들어 사회가 개방되고 풍요로워지면서 빠르게 변화되는 사회적 현상에 비판적 태도와 인간성 회복이라는 주제에 집중한다. 2000년대 이후에는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와 4차 산업시대를 맞이하면서 롤러코스터 자본주의와 승자독식 등 빈부격차 가속화를 비판한다.


▶ ‘충정훈련’에서 ‘5월 광주’를 본 뜨거운 시대
그는 미술대학 1학년을 마치고 이듬해 군 입대(1978)를 한다. 그리고 10·26(1979)때는 전군 비상상황에 전쟁이 난줄 알았다가 인근 보안대 병사가 ‘박정희가 죽었다’는 것을 알려줬다. 1980년 3월, 그의 부대는 이유없이 소총에 착검하고 충정훈련을 시작했다. 이어 5월, 광주의 폭동으로 계엄령이 선포됐다. 당시 ‘전우신문’은 ‘계엄군은 폭도와 대치 중 끝까지 참았으나 폭도는 계엄군에게 폭력을 가했다’는 기사가 1면에 크게 나왔다. 이때 부대원은 광주에 계엄군으로 투입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도 했으나 다행히도 광주에는 투입되지 않았다. 그리고 휴가를 다녀온 고참이 ‘광주에서 사상자가 많았다’는 상황을 전해줬다. 당시 상황인식이 없었던 그로서는 계엄군 시각으로 광주를 이해했을 것이다.

광주항쟁 이후 그의 부대는 ‘삼청교육대’가 설치돼 잡혀온 민간인을 교육시켰다. 그 민간인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20대 청년부터 60대의 소시민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닭장 차’속에서 살아서 나갈 수 없겠다는 두려움의 눈빛이었다. 그 사람을 보면서 나도 군인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잡혀왔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됐을 것이다.

그는 전역과 대학복학(1981년) 후 ‘5월 광주’에 대한 자료사진, 목도했던 사람의 구전, 사회과학서적 탐독은 역사와 사회, 시대를 바르게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젊은 혈기의 정의감은 동료화가와 시대상황에 대한 토론과 ‘부마항쟁’에 이은 ‘광주 5월’는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붓은 시대를 향한 칼이 됐고, 파렛트는 방패가 돼 맞서는 미술운동에 동참하게 했다. 이즈음 재학하던 홍대는 80년대의 시대상황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미니멀 화풍의 교수에 대한 불만으로 점차 흥미를 잃어갔다. 이 시기 그는 현대(순수)미술에 양식적 고민도 했다.

그는 대학을 자퇴하고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 하면서 ‘6월 항쟁’ 시위참여와 첫 개인전(1988· 관훈미술관)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민미협’(민족미술협의회)에 가입하게 된다. 이듬해 ‘노문현’(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에 진보적 화가들과 함께 가입한다. 민중문화 운동의 심화로 사회주의 이론과 자본주의 계급에 대한 모순, 사회과학에 대한 전반적 갈증을 하나씩 해소시켜 가면서 학습했다. 이렇게 그에게는 80년대라는 시대를 격렬하고 숨가쁘고 뜨겁게 달구면서 관통해갔다.

그는 영웅의식이나 공명심이 없는 내성적 성격의 소유자이다. 군대에서 경험한 ‘충정훈련’이 1980년 3월에 시작됐을 때 전쟁대비인가? 라는 의아심을 넘어 부대원들과 함께 두려움을 느꼈다고 했다. 2달 이후 ‘광주 항쟁’이 시작되고 진압했던 계엄군의 ‘충정훈련’을 보고 “광주를 대비했던가?”라는 생각을 전역 후 하게 됐다.

“그렇다면 그 무서운 시나리오를 신군부는 준비하고 있었다는 말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왜 광주였을까?” 대구출신이었던 그는 시대상황에 대한 의문에 의문을 풀어가며, 광주를 향한 애정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내성적인 성격인 그는 진보적 미술단체의 조직적이거나 전위적 행위에 참여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정의감과 시대양심에 따라 붓끝은 걷잡을 수 없이 확장시켜간다. 마치 충정훈련에 희생된 자들을 위로하듯이….


▶ 분단의 기억, 환유법의 미학어법으로
‘분단의기억’ 364×227㎝ (1989-1994)

90년대 이후 우리사회는 점차 안정화 되고 개방과 함께 풍요로워지는 듯했다. 이는 과거 10여년, 군부정권의 옥죄는 탄압 속에 경제발전은 일정한 속도를 내고 있었던 것이 도움이 되는 듯했다. 결국 권력에 대항 못하고 억눌렸던 민초의 피와 눈물어린 굵은 땀방울이 모여 경제적 급성장을 이끌었던 성과일 것이다.

이러한 사회상황을 주시하면서 노동운동을 시각매체 운동으로 확산시켜가던 중 1989년 7월, ‘임수경의 평양축전’을 놓치지 않고 약 5년간 심혈을 기울려 작품을 제작한다. 90년대 대표작 ‘분단의 기억’(1989-1994)은 44년 만에 남·북 통일의 씨앗을 뿌린 사건으로 세계적 큰 반향을 일으켰다. 대형 캔버스 중앙에 ‘임수경’양과 ‘문규현’신부를 중앙에 배치하고 한국현대사에 존재해 왔던 주요사건의 상징적 이미지를 담아냈다. 그리고 6·25전쟁에 고아가 된 소년, 광주 5·18의 계엄군과 아버지 영정을 든 어린이, 6·10항쟁의 화염병과 경찰, 김재규, 4·3제주양민 학살, 삼청교육대 등은 과거 부당한 권력의 역사적 사건을 서술적 나열했다.
‘뷰파인더 캔버스전’ 117×91㎝ (1996)

또한 그 이미지는 같은 화면에 사실적 정밀묘사 방식의 인물재현도 있지만 각 시대의 주요사건은 투박한 선으로 그려진 거친 형상은 크게 대비되고 색상도 붉은 색상과 푸른색, 그리고 진회색으로 톤을 이루고 있다. 동일한 화면에 서로 상반된 이미지 병합과 교차로 격렬했던 긴장감과 함께 시각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분단의 기억’은 한반도 분단이라는 무거운 시대상황과 통일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담아내기 위한 부당한 권력의 폭력을 함께 녹여냄으로서 더욱 굳건하게 한다. 이렇듯 주제를 담아내는 방식은 ‘환유법’이라는 문학적 표현기법의 인용과 시각화는 독창적이고 성공적 화법이라 보여진다. 이러한 형상어법은 작품에 주제인 분단현실 강조와 함께 역사를 관통하는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작품을 제작한 기간도 5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서두르지 않고 주제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이미지 중첩으로 무거움과 두터움으로 담아냈다.

그가 역사를 원시적 시점으로 바라보고 담아내는 회화적 깊은 내공은 차분하면서 내성적 성격이 반영된 제작태도 결과라고 보여진다.

또한 사회의 선정성을 부축이는 건강하지 못한 미디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미디어는 대중을 향한 매체로 사회저변에 있는 자극적인 문제를 꼬집어 대중의 눈과 귀를 가리고 우매한 대중으로 만들어 버리는 현대사회 ‘빅 브라더’의 비대해져 가는 모습을 읽은 것이다. TV모니터에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뉴스 앵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입은 또 다른 ‘빅 브라더’와의 신호를 주고받는 소통의 창구가 돼 진실을 가리고 우매한 대중을 위한 반복 교육시키는 것이었다.

이렇게 ‘빅 브라더’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세상을 조정하는 권력을 비판한다. 작품은 ‘TV’, ‘거짓말’, ‘권력’(1996) 등으로 캔버스 화면에 TV모니터의 앵커를 확대시켜 그려갔다.

90년대 중반부터 2004년까지 10여년을 공백기로 작품 활동을 뒤로 미루고 대구의 부친사업을 돕게 된다. 그리고 IMF로 인한 사업은 부도로 이어졌고, 그 충격으로 부친은 갑작스럽게 쓰러져 얼마가지 않아 돌아가셨다. 가장이 된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고비를 맞이한다.


▶ 신자유주의의 탐욕과 화려한 긴 그림자
그는 10여년 공백기를 넘어 일산에 작업공간을 마련하고 대형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그리고 90년대 후반부터 우리사회에 쓰나미처럼 몰려와 지배했던 신자유주의는 무한경쟁의 자본을 앞세운 현대인의 탐욕과 부조리, 사회적 불균형, 독점자본구조와 분배의 모순에 대한 현상을 다각적 시점에서 바라본다. 객관적 관찰자의 지점에서 좀 더 면밀하게 시대의 모순을 파고들어가며 비판적 현실을 조망하고자 한다.
‘그것만이 내 세상’ 130×162㎝ (2018)

그의 작품 ‘그것만이 내 세상’(2018)은 노래방의 화려한 조명 빛과 모니터에서는 가슴을 드러낸 여인이 거울에 반사돼 더욱 탐욕스러움과 선정성을 드러내고 있다. 노래방 천정의 발광체의 조명, 모니터의 선정성은 무한 자본을 앞세운 신자유주의 향락성과 판타지를 부축이고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마비시키는 듯하다. 현대사회는 이미지와 정보 홍수로 디지털 미디어의 속도는 일반적 상식을 뛰어 넘고 마치 현대인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위태롭기만 하다. 마초(macho)적 성향을 드러낼 것 같지만 드러내지 않고 오직 촉지(觸知)적 속성으로 더욱 기민하게 현대인의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말초신경이든 마초이든 모든 영역에서 자본의 논리는 작동되고 포획된 현재적 지점에서 그의 예술은 역설적이고 독창적인 회화양식으로 시대를 비판하고 꼬집어낸다.
‘촛불’ 227×182㎝ (2019)

그는 2017년 ‘광화문 촛불혁명’을 소재로 작품 ‘촛불’(2019)을 제작했다. 수많은 예술가는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자기 예술방식의 작품을 제작했다. 그 역시 거의 매주를 빠지지 않고 참여했던 ‘촛불시위’이었기에 또한 놓칠 수 없는 작품주제였을 것이다. 대형 캔버스에 ‘이순신 동상’을 캔버스 중앙에 놓고 수많은 촛불을 담아냈다. 임진왜란과 425년이라는 간극을 뛰어 넘어 2017년 대한민국을 지킨 영웅은 ‘촛불혁명’의 주체자인 국민이다. 그는 작품에서 425년이라는 역사를 교차시켜 ‘이순신’과 ‘촛불’, 두 영웅을 하나의 이미지로 묶어냈다. 이순신의 동상 속에 미륵부처와 홍길동, 도깨비와 해치, 전통기와의 해학성 모두 촛불정신과 맞닿은 형상들이다. 이렇게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이름의 영웅을 이순신과 함께 대형화면에 가득 담았다. 아마도 그는 광화문에서 우리시대의 수많은 ‘이순신’을 봤을 것이다. 이러한 우리시대의 영웅은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이라는 외줄에 기대어 롤러코스터를 매일 타야만 하고, 폭주하는 각종 미디어에 왜곡된 교육도 받고, 보이지 않는 ‘빅 브라더’의 연출에 춤을 춰야하는 순박함과 연약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참고 또 참고 더 이상 못 참으면 일어서서 세상을 뒤집어버리는 역사의 주인이자, 시대의 영웅일 것이다.

김영진은 ‘공명심’이나 자기 마케팅과는 거리가 멀다. 오로지 일산의 집과 허술하고 비좁은 작업실 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이라면 오로지 자기 미학으로 시대를 읽어가며 번뜩이는 발광체적 이미지로 시대 앞에 당당해지고 싶을 뿐이다. 그러한 그는 오늘도 어두운 작업실에서 신자유주의 화려하고 탐욕스런 긴 그림자를 분해와 분석을 반복하고 있을 것이다.


▶김영진(1956년, 대구생)
▶홍익대 중퇴
▶개인전 8회(서울)
▶단체초대전 2018 Oh! Real?전(나무화랑, 서울) 2015 서울서울서울 A3(시민청갤러리, 서울) 2014 나는 우리다(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 2013 내 앞에서다(세종문화회관 본관) 신라의 신화(경주 실내체육관) 2012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서대문 역사박물관) 2010 리얼리즘(마음등불, 헤이리) 1995 민중미술 15년전(국립현대미술관
제1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광주시립미술관) 외 30여회
▶주요작품 소장처 : 국립현대미술관(미술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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