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23일(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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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보는 명화이야기]Gray 리히터의 회색-진실을 마주할 용기
黑과 白, 모호한 경계 속 유연하게 흐르는 진실과 자유

  • 입력날짜 : 2021. 02.04. 19:05
게르하르트 리히터 作 ‘베티(Bety, 1988)’<위키피디아 검색>
아름다운 그림들을 볼 때 우리는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 이를 전달해 주는 요소로는 균형감 있는 형태와 구도 등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색채’를 빼놓고서는 이야기하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밋밋한 색채보다는 화려한 색을 더욱 선호하는 경향이 있을뿐더러, 다채로운 색감이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을 반영이라도 하듯 예술의 경계가 허물어진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는 아예 형태나 구도 없이 오로지 색채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품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유명한 화가 잭슨 폴락이 시도했던 빈 캔버스 위에 물감 뿌리기 라던지 혹은 오로지 은근한 번짐을 보이는 거대한 색·면들 두, 세 개로만 그림을 구성해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거대 색면회화 작가 마크 로스코의 작품들을 들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인 색채는 우리 생활 전반에 걸쳐서 사용되어지고 있기도 하다. 길을 건너도 좋다는 의미의 초록, 멈춤을 의미하는 빨강 그리고 주황색 등까지 우리가 길을 건널 때면 늘 마주치는 신호등에서도 손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이렇듯 생활 속 색채는 사회 속에서 형성된 약속과 상징들을 그 안에 담아 의사전달의 역할을 해내기도 한다.

하지만 넘치면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말처럼 가끔은 현란한 이 색채들이 진저리치게 보기 싫어질 때가 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처럼 어지러운 오만가지 색들을 보고 있자면 푸르른 자연이 마냥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스트레스 상황이 진행되는 최악의 경우에는 이런 치유의 색마저도 보기가 싫어지는데, 이땐 그저 온 세상 색이 모두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바람만이 든다.

이런 기분을 표현하는 데는 ‘색이 없음’, 무채색(無彩色)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명상과 고요를 가져다주는 ‘회색’(Gray)으로 대표되는 무채색은 빨강, 파랑, 노랑 등 유색이 아니라 색상을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회색조의 범위’를 지칭한다.

회색분자와 같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없는 세상 그냥 모두 다 회색으로 변해버리면 조금 조용해지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다만 눈에 피로감을 적게 주는 회색이 눈부시던 색들에서 도망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줄 수 있는 색이기에 빗대어 이야기해보는 것이다.

화가들 중에도 이 독특한 색을 가지고 작업을 했던 작가들이 있는데, 그중 소개해 볼 작가는 독일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다. 1932년에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가족을 잃었고, 뿐만아니라 나치와 공산주의 체제에서 예술과 삶 모두를 철저히 억압받기도 했었다. 후에 서독으로 이주해 결국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내는 행보를 보여줬던 그지만 화가라면 큰 무기로 쓸 수 있을 색채를 그는 왜 포기했던 것일까?

그가 처음부터 그리고 오로지 회색만을 활용해 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니다. 리히터는 ‘매체의 순수성’을 바탕으로 ‘중심’을 늘 중요하게 여기던 모더니즘에 반대해 등장한 포스트모던 작가군에 속해있었다. 때문에 리히터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일관성 없음’이다. 그러나 일관성의 포기가 그만의 주된 특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성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제거해낸다는 의미로 늘 중심만을 찬양하던 ‘모더니즘에 반(反)한다’는 뜻이 더 크다.

따라서 그들은 매체 간의 자유로운 소통이 가능한 ‘인터-미디어’(inter-media)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했고, 포스트모던이 추구하던 ‘중심이 없는’, 즉 ‘끝없는 불확실성’을 추구하며 늘 새로움에 도전했다.

이런 리히터의 특징인 화면을 붓으로 문질러 포커스가 맞지 않는 듯 대상을 ‘흐리게 표현’하는 기법과 화가라면 무기로 써야 할 ‘색채를 그림에서 제거’한 것 모두가 독특하다. 게다가 이전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 마주하던 대상이 살아있건 혹은 정물이건 간에 모두가 ‘입체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면, 리히터는 ‘평면 사진’을 그대로 베껴 그림을 그렸다는 점도 매우 특이한 점으로 들 수 있다.

그의 대표작 중 실제 자신의 딸 사진을 보고 그린 ‘베티’를 보면 그림이지만 옷에 프린트 된 빨간색 꽃무늬 등은 얼핏보아 사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의도적 붓질로 뭉개놓은’ 윤곽선과 배경들에서는 사진인지 그림인지 모호함이 들기도 한다. 바로 이 오묘한 부분이 그가 현대 회화의 가능성과 회화의 개념들을 철학적으로 성찰하고 확장 시켜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리히터가 취했던 ‘회화와 사진 사이의 모호한 경계’는 최초 사진의 등장 이후 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의 이전 화가들이 추구했던 방법과는 차별성을 갖는다.

다시 말해 ‘사진이 하지 못하는 회화만의 그 무엇’을 찾아 헤매며, 추상에 추상만 반복하다 결국 자체의 매너리즘에 함몰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진과 회화 ‘양자 모두를 아우르려는’ 새로운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가장 리히터 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사진 회화’다. 그리고 그중에서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한 진솔한 고민까지 모두 녹아난 작품들은 ‘회색(무채색)’과 ‘흐리기 기법’(blurring)들이 사용된 것들이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作 ‘하이디 씨(Mr. Heyde, 1965)’ <위키피디아 검색>

그의 회색도 스펙트럼이 넓지만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가족초상화 시리즈’의 회색인데, 작품 중 ‘이모 마리안네’와 리히터의 장인을 그려 넣은 ‘하이디 씨’를 연결시켜 보면 좀 더 이해가 쉽겠다. 두 그림을 각각 보면 단순한 가족초상화이지만 속에 담긴 시대적 배경과 리히터의 삶을 연관해 살펴보면 ‘그 만의 회색’에 대한 진면목을 읽어볼 수 있다.

먼저 작품 ‘마리안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당시 14살이던 이모 마리안네와 화가의 아기 때 모습이다. 제시된 사진과 리히터의 작품을 함께 보면 그림을 그릴 때 리히터가 사진을 얼마나 많이 참고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림을 완성한 뒤 마른 붓으로 문질러 형상을 흐려놓아 매우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기는 하지만 그림만 봐서는 대상이 누구인지는 쉽게 알아보기가 어렵다.

리히터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마리안네는 당시 조현병을 앓고 있었고, 민족 우월주의를 주장하던 나치 당국에 의해 낙인이 찍혀 21세 되던 해 강제로 불임시술을 받고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는다.

다음 작품 ‘하이디 씨’에는 두 남성의 얼굴 측면이 보이는데 작품 하단에 ‘1959년 11월, 검찰에 출두하는 베르너 하이디’라는 글씨가 눈에 띈다. 이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는 두 그림의 끔직한 연결고리는 바로 하이디가 다름 아닌 리히터의 장인이라는 사실과 그가 이모를 강제 불임 시술을 했던 의사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리히터의 가족사는 가족과 가족이 아닌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 즉 나치 시대와 전후의 냉전 시대 그리고 동시에 국가의 이데올로기까지로 얽혀져 버린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作 ‘마리안네 이모(Aunt Marianne, 1965)’ <위키피디아 검색>

결국 전쟁의 참상과 끔찍했던 나치의 만행으로 인한 가족들의 죽음 등 감추고 싶은 삶의 조각이 작품 ‘가족초상화 시리즈’ 등을 통해 드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파렴치하고 혼란스러운 사실들이 세상에 공개된 후에 이모 마리안네는 나치에 의해 희생당한 대표적인 인물로 상징화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는 리히터는 참 혼란스러운 심정이지 않았을까?

그가 이 ‘회색’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사회주의 동독에서 자유주의 서독으로 망명하며 만나게 된 스승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영향이 컸다. 비록 ‘사회주의 리얼리즘’ 하나만을 바라봐야 했던 것에서 벗어나 서독에서 ‘그림과 삶에 대한 자유’를 얻긴 했지만 너무나 다양한 화풍들에 따라가기 바빴던 그다. 결국 스승과의 진솔한 면담 후 자신의 것을 찾기로 마음먹게 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비디오아트의 아버지 백남준과도 함께 ‘전위예술단체’인 ‘플럭서스’(Flux)에서 활동했던 것으로도 유명한 요셉 보이스는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자신만의 작품을 창조하는데 일조를 했던 인물이다.

그 또한 직접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생사의 기로에서 목숨을 구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숨김없이 과거의 기억이 가져다주는 아픔들을 작품에 드러내며 자신을 치유해가고 있었다. 또한 고정된 예술개념을 거부하고 자유를 지향했던 그는 누구든 자신에 삶의 형태를 예술작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잠재적 창조자라는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예술가’라는 명언을 남겼고, ‘모든 예술은 삶에서부터 비롯돼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리히터를 주제로 한 ‘작가 미상’이라는 영화에 담긴 요셉 보이스의 모습이 이런 그를 잘 표현해 주고 있기에 대사를 조금 첨부해 본다. 강의 시간 요셉보이스가 독일 거대 두 정당의 선거 포스터를 이젤에 얹어두고 학생들을 향해 이야기를 하고있는 장면이다.

“SPD(사회민주당), CDU(기독민주당)? 어느 당을 찍겠나?” 한동안 학생들 간의 의견이 분분하다. 잠시 뒤… “아무도 뽑지마. 다시는 정당에 투표하지 말고, ‘예술’에 투표하도록.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해. ‘오직 예술에서만 자유는 환상이 아니야.’, 나치의 재앙 이후 예술가만이 사람들에게 자유의 감각을 돌려줄 수 있어. 외부의 지도 없이 자기의 능력을 개발한다면, 사람은 누구나 예술가가 될 가능성이 있어. 너희는 세상을 구할 사제이자, 혁명가이고 해방가가 될 수 있단다.”

그의 영향을 받은 리히터도 현란했던 그동안의 모든 꾸밈들을 화폭에서 제거하고 오롯이 자신의 내부에 침잠해가며 그림에 집중해 갔다. 이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자신의 과거가 담긴 ‘흑백 사진’을 손에 들게 된다. 현란한 색상의 거품들을 모두 걷어내고 역사 속 진실과 자신의 마음을 마주 보려 했던 리히터의 용기가 사뭇 대단해 보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손을 통해 흑과 백의 강렬한 대비뿐이던 흑백 사진은 흐릿해지고 사이 경계선 또한 무뎌지게 된다. “회색에는 다른 색에는 없는, ‘없음’을 보여주는 능력이 있다” 어쩌면 동양철학의 어디쯤과도 맞닿아 있을 것 같기도 한 그의 언급은 특유의 ‘흐리기 기법’과 그의 잔혹한 가족사를 담은 ‘회색’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이처럼 1960년부터 시작된 그의 회색회화는 흑백의 명확함을 피해 양자 모두에서 거리를 취한 것이기도 했고, 삶과 죽음, 가해자와 희생자, 예술가와 국가, 감상자와 회화 사이 경계선을 흐려놓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그의 회색은 극단을 벗어나긴 했지만, 중간에 끼인 사이의 그것으로서가 아닌 모든 색들을 중화시켜 껴안을 수 있는 힘을 보여주고 있음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회화의 본질에 대한 그의 성찰이었고 이는 ‘유연하게 흐르는 자유’ 또한 리히터에게 부여했다.

리히터의 회색이 가지는 힘은 ‘늘 자유를 추구하는 예술의 목적’과도 꽤 닮아있다. 말로서 전달되는 의미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지만, 모든 것이 의미의 그물망에 걸려드는 것이 아닌 것으로, 즉 말할 수는 없지만 만들고, 제시하고, 보여주며 세상과 삶 속에 숨겨진 ‘진실’과 ‘자유’를 찾으려 노력하는 그것 말이다.

이현남<전남대 미술이론 박사수료>
필자는 이런 일들을 해내는 이들이 바로 예술가라고 본다. 꼬치꼬치 힘겹게 설명하지 않고서도 몸에 밴 듯 누구보다도 있는 그대로 ‘진실된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며 멋지게 그 의미를 전달해 내기 때문이다. 비록 알고서건 아니면 느끼는 데로 표현하는 것이던 간에 이런 일을 누구보다도 자연스레 해내는 예술가들이 참 멋지다.

세상사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컬러를 힘으로 알고 사용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장점과 특성을 ‘힘의 논리’ 속에서 작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응당 추구해야 할 것들을 위해 사용한다면 얼마나 좋겠나? 오로지 예술가만이 이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이기에….

나는 예술을 그리고 예술가들을 사랑한다. 결코 쉽게 이뤄질 수는 없을 테지만 우리에게 아직도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여전히 우리 곁에 예술가들이 존재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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