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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불편하다면…
해와인문기획 시네필로 ‘손님’과 레드 콤플렉스

  • 입력날짜 : 2015. 07.22. 19:23
철학은 상징적 이야기인 신화(mythos)가 합리적 논리인 이성(logos)에 의해 전복되는 역사를 거쳐 왔으며, 근대에 이르면 ‘참으로 인간적인 것’을 구현한다는 이상을 이루기 위해 합리적 사유가 더욱 강화됐다. 이 과정에서 논리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것들은 미신의 영역으로 추방되었다. 하지만 과학적 명제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초월적 희망은 남아 있다. 그것은 예술이나 종교, 혹은 정치적 신념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가깝게는 전승된 집단 무의식을 승인하는 데서도 살펴볼 수 있다.

‘손 없는 날’은 우리 민속신앙에서 결혼이나 이사 등 중요한 행사를 치르기 좋은 날을 말한다. 이때 ‘손’은 사람의 활동을 방해하는 악귀를 칭하는 ‘손님’을 줄인 말이다. 특히 전염성과 사망률이 높았던 천연두는 그 파괴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마’나 ‘두역신’이라 불리기도 했고, 외국에서 온 이질적인 병으로 여겨 ‘손님’이라고도 불렸다. 신천 양민학살 사건을 다룬 황석영의 소설 ‘손님’은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당대의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를 ‘손님’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영화 ‘손님’은 이질적인 것에 대한 공포를 신격화했던 우리네 민속신앙의 정서를 담아 독일의 ‘피리 부는 사나이 전설’을 변주해낸다. 영화는 한국전쟁 종료 직후인 1950년대 가상의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떠돌이 악사 우룡은 아들의 폐병을 고치기 위해 서울로 가던 중 마을을 발견해 며칠 신세를 지려한다. 지도에도 없는 이곳의 주민들은 외부와 단절된 채 자급자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촌장은 우룡이 마을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는 대가로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주민들에게 발설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정주민/떠돌이, 원주민/이방인, 비장애인/장애인, 한복/양복, 표준어/사투리 등 마을 주민과 우룡 부자의 갈등은 대립적인 설정을 통해 암시된다. 이질성에 대한 공포는 그것을 괴물로 비하하거나 신으로 숭상하면서 극복하는 법이다. 우룡 부자가 마을의 오랜 문제였던 쥐떼를 소탕하자 마을 주민들은 이들을 환대한다. 경계해야할 절름발이에 불과했던 우룡은 이제 영웅이 되었다. 주민들은 곰방대 대신 우룡이 준 양담배를 피우며 마을 밖을 궁금해 하고, 우룡의 서양피리와 아들의 바이올린 가락에 흥겨워하며 잔치를 즐긴다.

하지만 촌장은 이 잔치에 참석하지 않는다. 촌장은 그간 자신의 카리스마로 유지되던 마을의 통치체계가 균열이 나는 것을 직감한다. 촌장은 우룡이 빨갱이라고 마을 사람들을 선동한다. 빨갱이로 몰린 우룡은 약속한 사례금을 받지 못하고 손가락까지 잘려 마을에서 쫓겨나고, 촌장에 의해 아들마저 잃자 마을로 돌아가 피의 복수를 단행한다.

마을 주민들은 왜 촌장의 말을 따랐을까? 촌장은 원주민을 학살하고 마을을 차지한 주민들의 원죄의식과 공포를 교묘히 이용한다. 그는 생존의 불안감 부추기기, 외부에 가상의 적을 설정하기, 이편과 저편으로 분할하기, 저편을 외부의 적과 연관 짓기 전략을 통해 이편이 정의롭다는 결론을 마련한다. 이제 우룡이 빨갱이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마을을 보호한다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우룡은 빨갱이여야 하는 것이다.

촌장이 방 깊숙이 일본 군복을 숨겨둔 친일파였다는 설정은 영화 속 마을을 국가적 차원의 담론으로 확장시킨다. 누구보다도 국가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했지만 내부적 권력을 향유했던 촌장은, 권력 유지를 위해 기존 공동체의 수호를 필사적으로 부르짖는다. 영화는 국가를 위협하는 불온분자를 척결하자는 애국자들의 외침 뒤편에 놓인 권력 유지 메커니즘을 폭로한다. 게다가 영화는 통쾌한 복수를 통해 권력 전도가 이뤄진 유토피아를 그리지 않고 모두가 자멸하는 디스토피아로 끝난다. 이 영화가 불편한가? 그렇다면 우리가 여전히 레드 콤플렉스라는 질병을 앓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는 이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한다. 디스토피아적 전망 속에서 진정한 유토피아가 피어나는 법이니까.


시네필로는 철학적 지점에서 영화를, 영화적 지점에서 철학을 말하고 묻는 해와문화예술공간의 인문기획으로 격주 수요일 퇴근길 운림동 숙실마을 해와 소극장에서 해와자유대학 지식강좌의 하나로 진행하고 있다.


/최송아(전남대철학연구교육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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