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이나 출신, 스펙 등 뭐 하나 제대로인 게 없는 여자가 있다. 운 좋게 대학 선배의 인맥으로 대기업 아쿠아리움의 인턴으로 일할 기회를 얻는다.

정직원 채용이라는 달디단 열매를 얻기 위해 그가 수행할 것이라고 기대되는 일을, 이상하게도 여자는 도무지 해낼 생각이 없어 보인다. 온갖 실수를 연발하고 마감 시간을 어기는 건 예사이며 사무실에서 빡센 업무 대신 스마트폰 게임을 한다.

참다못한 직상상사가 “누가 널 뽑아주냐, 우리 회사가 복지시설인 줄 아냐!”라며 인턴의 무능력함을 만천하에 인증해도, 어쩐 일인지 여자는 정직원으로 최종합격한다. 어떻게? 회식자리에서 ‘조개 깨부수기’의 신공을 발휘한 대가로, 그리고 ‘조개’가 환기시키는 그 닳고 닳은 상상력이 지시하는 바 그대로.

유명 웹툰 작가인 기안84의 신작 ‘광어인간’의 한 에피소드다.

나는 그의 작품을 구독까지 하면서 보는 사람은 아니고, 그의 작품이 여성비하 논란으로 여러 뉴스에서 언급되고 나서 그 웹툰을 봤다.

여자주인공이 뭘 어떻게 했길래 듣도 보도 못한 신공을 발휘했다는 것인지 확인할 겸. 그런데 웬걸, 그 만화에서 여자주인공은 말 그대로 조개를 ‘깨부수었다’.

최근 여성혐오 논란을 빚고 있는 기안84의 웹툰 ‘복학왕 광어인간’ 캡처. 성상납을 대가로 정직원에 최종합격된 것을 암시하는 장면.

빨간 플라스틱 간이의자에 몸을 뉘고 자기 몸통만큼 커다란 조개를 배 위에 올려놓은 뒤 길고 굵직하고 단단한 물체로 그것을 내리치는 것이었다. 이 작가로 치자면 그동안 여성 비하 전력이 화려해 사실 별로 놀랄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어떤 비유나 은유 없이 그저 조개를 깨부수는 장면을 묘사하는 그 원초성이 놀라웠고, 특정 단어를 그렇게 우려먹으면서 인기 웹툰작가의 명성을 유지한다는 것도 놀라웠다(심지어 여자주인공의 이름은 봉지은이다. ‘봉지’라는 단어가 인터넷에서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는 봉지닷컴을 한번 검색해보면 된다).

그런 작품이 독점적인 시장점유율을 자랑하는 1위 포털사이트에서 버젓이 연재되고 있었고, 그 작가는 공중파의 간판 예능 프로그램에 오랫동안 출연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줄까.

이 에피소드가 공개되고 나서 이 작가의 네이버 연재 중단을 위한 서명운동이 벌어졌고, 예능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제야 작가는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봉지은이 귀여움으로 승부를 본다는 설정을 추가하면서 이런 사회를 개그스럽게 풍자할 수 있는 장면을 생각했는데 깊게 고민하지 못했다”고 말하며 사과했다.

우리가 봐 온 많은 사과문이 그렇듯, 이 작가의 사과문 또한 그가 얼마나 구태의연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그가 여성을 얼마나 대상화하고 있는지를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회사에서 일이 아니라 귀여움으로 승부를 보고 회식자리에서 조개를 깨고 남자 상사에게 성상납 하면서 정직원이 되는 여성 캐릭터가 그저 ‘설정’이라는 이유로 납득될 수 있는가.

개그스럽게 풍자하려 했다는 변명은 또 어떤가. 재미를 추구하다 보니 특정 부분에 대한 고민이 덜했다는 말은 내게 마치 하나의 고백처럼 들린다. 특정 집단의 재미를 위해 특정 집단의 희화화는 불가피했고, 그 과정에서 특정집단이 불편함을 느꼈을지라도 그것이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고백 말이다.

희화화나 개그, 유머가 갖고 있는 힘과 위험성의 양면을 고민해보지 않았다는 건, 문화물을 생산하는 작가로서 직무유기에 해당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지적하면 또 다시 누군가는 ‘웃자고 한 이야기에 죽자고 달려드는 사람’ 취급하면서 드립치는 발빠른 대처능력을 발휘할는지 모르지만, ‘웃자고 한 이야기’에 누가 웃고 누가 희생되는가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어떤 여성이 “학벌, 스펙, 노력, 그런 레벨의 것이 아닌”것을 자원으로 삼아 경쟁의 공정성을 해하고, 실수를 저질러놓고도 ‘애교가 생존전략’이라며 퉁치는 인물로 그려졌을 때, 과연 누가 웃고 누가 희생되는가? 이런 여성 캐릭터들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동안, 능력 있는 조직구성원이 되기 위해 오늘도 ‘노오력’하는 숱한 인간 여성들이, 조개 깨부수는 신공을 발휘하는 이미지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책무를 다하기 위해 공부하고 노동하고 관계맺고 소통하는 여성들이, 누군가의 성적대상이 돼 일자리를 보장받는 이미지에서 얼마나 해방될 수 있느냐 말이다.

혐오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바탕으로 그들을 도덕적으로 단죄하고 낙인 찍으면서 배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은 희화화와 유머로 쉽게 둔갑한다. 그래서 우리는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 웃자고 한 이야기 속에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이 스며있는 것은 아닌지, 재미있자고 한 표현 속에 특정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말이다.

정미경 <광주여성가족재단 근무 소라넷 다큐소설 ‘하용가’ 저자>

나의 재미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용납한다면, 누군가가 배제되고 차별받는 현실을 만드는데 나 또한 동참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특정 집단이 그렇게 희생되면, 시민으로서의 나의 권리 또한 침해되기 쉬워진다. 우리 모두는 연결돼 있고, 한 사람이 시민됨은 다른 사람의 것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의 그 웹툰 작가가 잠시 출연을 중단한 예능 프로그램의 게시판에는 그의 출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많은 모양이다. 제작진 또한 그의 하차를 일정 기간이라고 했으니 다시 그가 공중파에서 시청자들을 만날 가능성은 큰 것 같다. 그 정도의 팬덤을 소유한 작가라면 웹툰 연재 중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여성 혐오 발언으로 물의를 빚는 연예인들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 버젓이 방송활동을 재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신의 창작물이 끼칠 영향에 대해 고민해볼 수도 있다. 재미가 갖는 위험에 대해 고민하고,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개그와 유머를 구사하는 작가로 성장한다면, 그는 유명하고 돈 잘 버는 작가를 넘어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을 지도. 그가 위대함을 꿈꾸기를 소망하는 것, 그것을 일러 개그라고 할는지도 모르지만.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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