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고전이 돼 버린 만화 ‘찰리 브라운’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방학이 끝나도 학교에 오지 않은 찰리 브라운에게 나이 많은 선생님이 찾아간다. 선생님은 “개를 돌봐야 해서 학교에 갈 수 없다”는 대답을 찰리에게서 듣고 묵묵히 돌아선다.
찰리 브라운이 다시 학교에 가게 된 이유에 대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쨌든 그가 다시 학교에 갔을 때 나이 많은 선생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방과 후 선생님의 집을 찾아간 찰리는 “고양이를 돌봐야 해서 이제 더이상 학교에 가지 않는다”는 대답을 선생님에게서 듣는다.
선생님의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은 찰리는 묵묵히 뒤돌어선다. 이 에피소드를 처음 읽었을 때는 누군가를 돌보기 위해 그 곁에 머무를 마음을 내었던 어린 찰리의 마음이 순수하고 아름다웠고, 그 마음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나이 많은 선생님의 마음도 순수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사회 온갖 곳에서 돌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지금, 나는 다시금 이 이야기를 떠올렸고 순수하고 아름답지만은 않은 생각들을 했다.

찰리가 고양이를 돌본 것은 어쨌든 단기간이었다.

평생 고양이를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학교에 가지 못했다면 그는 매일 울지 않았을까…. 선생님도 그렇다. 아마도 그는 출근하지 않아도 먹고 살 걱정 없을 정도의 여유자금은 모아뒀을 거고, 집도 자가였을 것이다.

고양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지갑에서 숭숭 빠져나갈 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이었을 거다. 그랬으니 죽을 때까지 고양이를 돌볼 마음을 낼 수 있지 않았을까…. 뭐 그런 생각들.

누군가를 돌보는 것은 분명 시간과 정성, 그리고 돈이 드는 일이다. 시간과 정성을 들일 마음을 내어도 돈이 없다면 충분한 돌봄은 불가능하고, 돈과 정성을 들이는 것도 시간을 써야 가능한 일이다.

이 당연해 보이는 사실을 다시금 지적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는 이유로 우리는 이를 너무 자주 까먹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고 싶어서다.

지금의 돌봄은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고, 많은 경우 그 누군가는 여성들이다.

아이를 돌보느라 사회적 공간에서 물러서게 되는 여성들, 노인을 돌보기 위해 감정적·육체적 노동에 지쳐 소진되는 여성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숱하게 목격할 수 있다. 물론 누군가를 돌보는 모든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아니겠지만, 돌봄이 피할 수 없는 의무로 다가왔을 때, 누군가를 돌보기 위해 내 삶이 송두리째 유예돼야 한다고 느꼈을 때, 돌봄은 더이상 행복한 경험이 될 수 없다.

의무라는 건 피할 수 없다는 의미이고, 피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때 사람은 빛보다 어둠을 닮아가게 마련이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돌봄노동으로 인해 삶이 황폐해져 가도 그것을 입밖으로 꺼내어 말할 수 없는 현실이다.

여성은 생태적으로 누군가를 돌보는데 적합한 특성을 지녔다고 인식되는 여성성의 신화가 있고, 아이를 돌보는 건 여성의 당연한 역할이며 아이를 돌보면서 늘 기뻐야 한다고 설파하는 모성의 신화가 있다.

여성이라는 존재에 부착된 이러한 신화가 너무 굳건해서, 타인을 돌보는 것이 정작 자신을 죽이는 경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소리내어 말하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은 나쁜 엄마가 되는 것보다 신경증을 택하고, 이기적인 딸이 되는 것보다 스스로를 자책하는 길을 택한다. 그러나 겉으로는 선택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그 길로 내몰리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맞다.

‘아이 하나 키우는데 마을 전체가 애써야 한다’라는 사회적 돌봄의 목소리가 커져가고, 돌봄의 공공성 강화만이 저출생의 해결책이라고 내놓으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돌봄의 궁극적 책임을 여성에게 돌리면서 그 희생을 당연하게 전제한다.

여성에게 전가하는 돌봄의 의무는 가족의 테두리 안에 여성을 한정 지으려는 불순한 의도와 맞닿아 있는데, 이는 여성을 온전한 개인이자 어엿한 사회구성원으로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명확한 표식으로 내게는 읽힌다.

여성은 노동자이고 시민이자 직업인이며 생활인이지만 그것보다 더욱 우선한 것은 어머니이고 아내이며 딸이자 며느리라는 가족구성원의 이름이다.

잘나가는 여성 CEO에게 “남편 밥은 어떻게 챙기나요?”를 묻는 인터뷰가 여전히 실리고, 맞벌이 직장여성에게는 늘 “아이들은 어쩌고?”라는 걱정이 따라붙는다. 이번 추석, ‘코로나19’로 인해 고향방문 자제하기 캠페인이 일어났을 때도, “며늘아가, 이번 추석은 우리끼리 지낼란다. 걱정마라”라는 플래카드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가족으로부터 독립적인 여성의 홀로서기는 이처럼 아직 미완이다.

가정을 유지하는 것이 여성의 역할로 이해되는 한, 돌봄의 의무 또한 모성의 이름으로, 가족의 이름으로 여성에게 전가될 것이다. 그러니 돌봄의 인식 전환은 가족구성원의 이름으로 여성을 호명하는 것을 멈추는 것, 그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랬을 때 우리는 그동안 직면하지 않았던 근원적 질문, 누가 누구를 돌볼 것인가, 어떻게 돌볼 것인가, 왜 돌보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비로소 시작할 수 있다.

그런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돌봄 역시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경험할 수 있는 다채로운 삶의 한 장면으로 다가와야 하고, 언제든 삶이 황폐해져간다고 느껴질 때면 중단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돌봄의 경험은, 돌보는 사람이나 돌봄을 받는 사람이나 의무와 책무, 역할의 경험이 아니라 연민과 연대의 경험이어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며, 내게 도움을 주는 타인의 손길에 감사하면서 동시에 미래에 직면할 어떤 타인의 고통에 연대하는 것, 그것이 돌봄의 경험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미경 <광주여성가족재단 근무 소라넷 다큐소설 ‘하용가’ 저자>

그 경험이 꼭 가족끼리 일어날 필요는 없다. 가족의 이름으로 의무를 지는 대신, 서로의 일상을 주고받는 동네 친구끼리 돌봄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실험도 이미 진행 중이다. 희귀암을 앓는 1인가구의 비혼여성을 돌보기 위해 간병의 시간표를 짜고, 목욕과 세탁의 일거리를 나누는 동네친구 공동체를 나는 알고 있다.

이 느슨한 공동체는 동네 할머니가 키우는 강아지의 병원비를 모으기 위해 시작됐고 혼자 사는 아픈 이를 위해 아주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새로운 돌봄의 연대이고 진정한 돌봄의 실험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누군가를 돌보기 위해 곁을 지켜주는 찰리 브라운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시간과 돈, 정성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와 연대에 대한 공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관계와 연대란, 엄마와 아들, 아버지와 딸이 아니라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지만 결코 그 빚이 서로를 옭아매지는 않는 사람들끼리의 일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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