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6(목)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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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현상기가 들어왔고, 사진부 작업실은 최고의 시설로 꾸며졌다. 고급스캐너와 맥킨토시 장비로 디지털화된 사진을 마감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장비를 구입하라고 현찰로 1억원을 주었으니 사진부에 대한 지원이 아낌없이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야 이러한 미끼(?)가 매일 내 머리털을 털어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3시에 데스크들이 제작회의를 했다. 마땅한 1면 사진감이 없어 회의가 끝나지 않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겨우 회의를 마무리하고 나면 덩치가 큰 선배 정치부장이 통신사 텔레타이프를 찢으면서 어김없이 “어이 영상이, 회의는 빨리 끝내세”하면서 콧바람으로 저격했다.
이렇게 시작된 매일 1면 컬러사진 제작 스트레스는 사진부회의가 길어지게 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서울주재기자를 전화로 소환했으며 사진전송기만 쳐다보는 것이 일과였다. 그러한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는 일은 뉴스체크의 생활화였다. 새벽에도 눈만 뜨면 뉴스채널을 습관처럼 켜놓고 조는 습관이 생겼다. 1997년8월 괌에 KAL기가 추락했다. 광주의 국회의원과 지역구 사람들이 다수 탑승했으니 대형사고다. 후배에게 전화했다. 뉴스를 더 보면서 대기하고 서로 연락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후배는 잠결에 “구암이면 화순인가요?”
가끔 다행히 연기자가 전송기로 마감해 오는 날은 잔칫날이었다. 연기자는 당시 연합통신, 지금은 연합뉴스의 별칭이다. 중앙뉴스에서 컬러감이 전송되어 온 날은 사진부는 경사, 그 자체였다. 자판기 커피 한잔 빼들고 휴게실을 배회하노라면 편집부 후배기자도 연기자가 한건했냐고 놀린다.
한번은 해남간척지에 황새가 8마리가 왔다는 제보를 받았다. 고향마을 앞 간척지라서 지리를 잘 아는 나의 몫이었다. 편집국장 보고 이후 3시 회의를 후배에게 부탁한 후 해남으로 향했다. 그 넓은 간척지에서 아무리 우리나라 새 중에서 가장 크다지만 황새를 찾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두어 시간을 개답공사가 한창인 간척지를 돌았지만 허사였다. 곧 해도 질 것이고 색온도가 떨어지면 황새무리를 만나더라도 더 이상 선명한 컬러사진을 마감할 수 없다고 판단해 제작회의를 대신 참석한 후배에게 보고하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한바퀴 돌려고 할 때 답이 왔다. “편집국장께서 오선배 나쁘닥 사진을 1면에 마감하라는데요. 마땅한 1면 사진감이 없어 초비상입니다요” 나더러 어쩌라고? 그때 개답공사 중인 흙더미 너머로 황새 8마리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 아닌가. 초망원렌즈를 장착한 카메라의 모터드라이브가 자동소총처럼 기계음을 냈다. 그 이후 불가능할 수 있는 1면 사진도 나쁘닥 사진 협박으로 해결해 내는 초능력을 갖게 됐다.
매년 12월 말에는 새해사진 기획회의로 사진부는 담배연기로 가득하다. 회의가 끝나면 시쳇말로 돌대가리 굴리느라고 돌가루가 가득하다는 것이다. 1999년 12월에는 중순부터 기획회의를 했다. 다가오는 새해가 바로 2000년, 뉴밀레니엄이기 때문이다. 직접 촬영에 나서기로 했다. 우선 전남의 바다에서 일출을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곳을 물색했다. 여수 안도로 정했다. 800㎜초망원렌즈에 2x커버터를 장착했다. 1600㎜초망원렌즈를 만들었다. 무전기도 두 대 챙겼다. 여수 안도는 비렁길로 널리 알려진 금오도 인근 섬이다. 두 섬 모두 다도해해상국립공원 구역이다.
어선을 부탁하고 다음날부터 여명이 밝아오면 배를 몰아 무인도에 내려 삼각대에 장비를 장착하고 배를 해 뜨는 방향으로 보내 무전기로 일직선을 만드는 작업이다. 당연히 첫날부터 실패했다. 오메가모양으로 바다위로 떠오르는 배안에 어선을 넣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데 대부분 12월의 날씨는 해무가 가득해 해가 수평선위에서 떠오르는 날이 그리 많지 않다. 7일간 허송세월을 보낸 후 전화했더니 또 나쁘닥타령이다. 요즈음 젊은 세대의 표현대로라면 ‘헐’이다.
제작일을 3일 남겨두고 마냥 대책 없이 섬에 처박혀 있을 수 없어 귀사한 후 만일의 경우에 들이밀 2안을 상의하고 다시 섬으로 갔다. 그리고 그 다음날 ‘동명일기’처럼 수평선 위에서 붉게 타오르는 태양 안에 어선을 집어넣는 ‘매직’을 연출할 수 있었다. 보고전화를 했더니 “어이, 그렇다면 7일전에 갈 것이 아니라 1박2일 일정으로 갔어야지”, “…”
1996년 에베레스트원정대에 잡혀갔다. 잡혀갔다는 표현은 야생화를 촬영하려고 야산정도는 다녔지만 알피니스트는 아니었다. 감히 세계의 지붕, 에베레스트를 간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편집국장의 지시로 갈 수밖에 없었다. 사진부 데스크로 매일 후배기자들에게 취재지시를 내리는 입장에서 편집국장의 취재지시를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죽을 고생을 하고 왔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여기에서도 1면 나쁘닥사진은 계속됐다. 원정대가 베이스캠프에 도착해 본격적인 원정을 준비하고 있을 때 원정대 후원사인 광주매일은 원정대 소식을 1면에 게재할 계획이었다. 마치 귀국 인원이 있어 슬라이드로 만년설을 배경으로 원정대원들의 스냅사진을 촬영해 보냈다. 며칠 후 위성전화를 했더니 왜 내 사진은 빠뜨리고 보냈냐는 것이다. 세 번째 필름 마지막부분에 두 컷 있으니 다시 확인하라고 했더니 얼마 후 ‘셰르파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결국 1면 나쁘닥 사진은 협박용이지, 진짜 게재하는 데는 인색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실 일반인이 1면에 자신의 얼굴 사진이 실리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인가. 매일 1면 사진감 후보에 오르는 나는 행운아 아닌가. 그것도 10년간 변함없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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